▲앞줄은 고 리영희 선생님과 사모님, 뒷줄은 왼쪽부터 '부미방' 김은숙씨, 임수경씨, 소설가 유시춘씨. 임수경씨에 따르면 2년 전에 함께 찍은 사진인데, '서정' 블로그에 올려져 있다.
임 "언니, 1982년 사건 이후로 뭐 힘든 거 없었어?"
김 "야. 옛날 생각난다. 양평 햇살. 딴 사람들은 볕이 뜨거워서 모두 그늘로 숨는데 유독 너랑 나만 햇볕으로 나가 광합성을 해야 한다고 했었지."
임 "하하. 맞아. 나 지금도 내복 입고 다니잖아. 징역살이 오래 한 사람들은 추운 걸 너무 싫어해서 항상 햇볕을 쫓아다니지. 보통사람들은 뜨겁다고 해도 우린 따뜻하잖아. 그치? 그날도 언니가 배 아프다고 했었어."
김 "그랬나? 하여간 우린 너무 추운 감옥에 오래 살아서 아무튼 따뜻한 곳이 좋아."
임 "큰딸과 작은딸. 뭐가 됐으면 좋겠어?"
김 "큰애는 철학공부 하고 싶다고 했고. 둘째는 미학 하고 싶대. 큰 애는 유학시험도 치고 싶은 모양인데, 엄마가 아프니 뭐. 당장 학교 가고 싶은가봐. 딱 1년 다니고 내가 이렇게 돼서 계속 같이 병원 다니니까 저도 왜 안 힘들겠니."
임 "두 딸 너무 예뻐. 잘 길렀어."
김 "(피식 웃으며) 나 여기 오기 너무 잘한 것 같아. 계속 자연요법으로 음식 조절하고 운동하고 그랬는데 점점 더 통증이 심해지는 거야. 그날 저녁 딱 죽겠더라고. 병원 가야지 했다. 딱 위기가 느껴지더라고."
임 "주치의 선생님 너무 고맙지."
김 "그럼. 내가 건석이(리영희 교수 둘째 아들, 녹색병원 외과 과장)를 아주 어릴 때부터 봤으니까 난 너무 든든해. 실은 내가 1982년 사건으로 감옥 갔다 와서 줄곧 리영희 선생님 댁에 살았어. 윤영자 엄마 밥이 너무 맛있어 가지고. 김치가 얼마나 맛이 있었는 줄 아니? 난 그때 돼지 간에 계란 입혀 먹는 걸 처음 배웠는데, 너무 맛있었어. 이 반찬, 저 반찬 많이도 꺼내먹었다. 리영희 선생님이 책 쓰시면 교정 봐드리고 밥 얻어먹고 그렇게 살았지 뭐. <역경의 시대> 그거 나도 같이 교정 봤지."
임 "언니네 사건 재판 때도 오셨다며."
김 "호호. 그럼. 재판 때 참고인으로 오셨지. <전환시대의 논리>를 봤잖아. 그 책 읽고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까 재판부가 선생님을 증인으로 채택한 거야. 선생님 늘 갖고 다니시던 검정 가죽가방 있어. 그거 갖고 오셔서 재판정에 얌전히 앉아계시다 진술하셨지."
임 "리영희 교수님하고 추억도 많겠다."
김 "그럼. 재밌었어. 필담 많이 했어. 일본어로."
임 "왜?"
김 "공부하라고. 그땐 사회과학서적이 한국말로 된 게 없었어. 일본어나 독일어 원전을 봐야했거든. 책이 없었으니까. 일부러 어학공부를 안 하면 안 됐지."
임 "언니야. 안 외로웠냐?"
김 "외로웠지. 삶 자체가 쉽지 않았고. 먹고 사는 것도 참 힘들었어. 다만, 지난날을 생각하면 가슴 아플 때가 많아. 늘 돌아보면 아픈 게 많잖아. 애들한테는 82년 사건을 잘 얘기 안했어. 역사공부에 도움 되라고 80년 광주사태를 얘기하긴 했지만 엄마가 뭔가 했었다 그런 얘기 하기 그래서 아예 안 했어. 애들은 잘 몰라. 그런데 뭐랄까, 성향은 있는 모양이더라. 둘째는 자기 친구들하고 촛불집회 따라다니고 그러더라. 춤추고 놀았대."
임 "하하하하하."
후원 물결 쇄도... 5일엔 작은 음악회도 열려자정을 넘겨 새벽까지 대화는 계속 됐다. 중간에 기자도 끼어들어 몇 마디 묻기도 했다. 말이 길어지자 따뜻한 무언가를 먹고 싶다고 하더니, 인스턴트 콘스프를 떠올렸다. 작은 플라스틱 통에 인스턴트 콘스프를 '삼박자 커피'처럼 타더니 티스푼으로 몇 숟가락 떠넘겼다. 많이 먹지는 못해도 이렇게 따끈한 걸 먹으면 식도가 시원해진다고 했다. 엄청난 병마와 싸우고 있는 그였지만 순간순간 재기발랄했다.
무려 1시간이나 대화를 나누니 피곤해했다. 눕고 싶다고 했다. 그를 눕히고 인사를 하려는데 임수경씨가 슬쩍 내 얘기를 했다.
임 "여기도 아줌마야. 애엄마."
김 "그래? 얼른 가요. 애들이 얼마나 기다릴까."
인사치레로 하는 예의, 다음에 다시 보자는 말을 그는 꺼내지 않았다. 차라리 임수경씨가 부추겼다. "자기 또 와야겠다. 언니가 편안해하네. 역시 여자들이 좋아!" 깔깔거렸다. 임수경씨는 마치 큰 언니에게 재롱떠는 막내 여동생처럼 굴었다. 장난도 잘 쳤고 농담도 잘 했다.
어디서 힘이 났을까. 그는 내 손을 꽉 잡았다. 악수 잘한다는 그 어떤 정치인보다도 더 세게 그는 내 손을 잡았다. 한동안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있다가 "이제 가라"며 손을 놓았다. 그리곤 잠시 눈을 감았다. 임수경씨는 담요를 덮어주었고, "내일 다시 올게"라며 손을 흔들었다. 간병인 아주머니는 미안하다는 말과 꼭 다시 오시라는 말을 연거푸 하며 사람좋게 웃었다. 임수경씨는 허리를 수차례 굽혀 인사하며 "어머니, 우리 언니 잘 부탁드려요"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병원에서 내려와 지인들이 모여 있는 호프집으로 향했다. 그 자리엔 김은숙씨의 주치의이자 리영희 선생님의 둘째 아들 이건석 녹색병원 외과 과장이 함께 했다. 이 과장은 "말기 상황"이라며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분위기는 침울해졌다. 임수경씨는 "언니를 외롭게 그냥 보낼 수 없다"고 했다. 트위터(@su_corea)에 사연을 올리니 하루만에 500만 원이 넘는 후원금이 모였는데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도록 못 하겠다고 악을 썼다. "자, 보라!"며 통장을 내밀었다. 네 장째 익명의 사람들이 돈을 보내고 있었다. 응원 메시지도 간절했다. 전직 운동권부터 이름난 소설가까지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고 있었다. 이런 데도 "언니를 쓸쓸하게 보내야 하느냐"고 울부짖었다.
오는 5일 오후 7시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에선 '김은숙을 위한 작은 음악회'가 열린다. 여기에는 시인 고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시인 이은봉, 소설가 윤정모, 유시춘, 이창학(벗이여 해방이온다 작곡가), 평화의 나무 합창단 시민악대, 새벽 출신 이성호, 전대협 출신 연출가 김정환, 한총련 출신 시인 황선 등이 참여 의사를 밝혔다.
이건석 과장은 "나는 김은숙의 주치의지만 보호자이기도 하다"고 했다. 어릴 적 봐온 김은숙씨는 어떤 분이냐고 물으니 "참 예쁜 누나"라며 배시시 웃는다. 평소에도 의사가운 없이 병실에 와서 곧잘 김은숙씨의 상태를 살필 정도다. 누구에게나 이 과장같은 주치의가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속으로 부러웠다.
임수경씨는 "우리 모두 김은숙씨의 보호자가 되자"며 "그녀가 치열하게 살았던 격랑의 1980년대, 이제는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겨져야 하느냐"고 개탄했다. 무엇보다 임수경씨는 "그녀는 지금 지치고 외롭고 아프고 가난하다"며 "82년 사건 이후 줄곧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사위어간다"고 울부짖었다.
함세웅 신부는 "툭 하면 용공좌경으로 몰았지만 김은숙씨는 의로운 의인"이라며 "한 학생이 죽는 비극을 낳긴 했지만 그래도 부미방이 있었기 때문에 광주의 비극이 전 세계로 알려졌고 전두환 군사독재의 끔찍한 실상이 외부로 알려질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신부들은 본디 기도만 할 줄 알아 모금운동 같은 건 생각도 못했는데, 임수경씨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으니 우리 신부들도 조금씩 돈을 모아 김씨를 위로할 생각이라며 작은 미소를 보냈다.
후원계좌 |
말기암 투병중인 김은숙님을 위한 희망 계좌를 만들었습니다. 문의사항이 있으신 분은 임수경씨 트위터(@su_corea)로 연락 주시면 됩니다. 애초 기사에 언급됐던 계좌는 오해의 소지가 있어 삭제했습니다. 독자여러분들의 양해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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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미방' 김은숙씨 후원 손길 이어져, 5천만원 모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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