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의 한 고깃집에서 인터뷰 중인 허린(왼쪽)과 한송이
이선필
사회적 폭력으로 희생당한 영혼을 연기하는 배우로서의 중압감을 걷어내고 보면 두 사람은 아직 20대 초반. 또래 여학생들처럼 공연이 없을 때는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며, 친구들과 수다도 떤다.
안양예술고등학교 동문인 둘은 어린 나이에 연기를 시작했다. 한송이씨는 중학교 때 3년 동안 연극반 생활을 하며 연기의 재미를 알았다. 허린씨는 연기를 하기 전에 쇼트트랙 선수를 준비했지만 아름다운 여자로 살고 싶어 운동을 포기했다. 입학 후에도 연기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허린씨는 1학년 워크숍 때 오른 연극무대에서 비로소 관객들의 박수가 짜릿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20대가 되어 배우로 다시 만났다. 허린씨는 영화 <영도다리>의 '상미' 역으로 시작해 공연 쪽으로 연이 닿았고, 한송이씨 역시 간간이 독립영화에 출연하고 학교 내 극단 활동을 했다.
이들이 재회한 지점은 극단 '현존 퍼포먼스'에서 작년 12월 무대에 올렸던 연극 <캘리포니아>. 이 작품으로 둘은 <TAXI, TAXI>의 오디션 제의를 받았고, 무려 250명 가운데 뽑혔다. 김상수 연출가는 두 사람에 대해 "연기가 산만하지 않고 깔끔합니다"면서 "앞으로 크게 성장할 배우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평가했다.
"예술성도 있어야 하는데, 대중들을 코믹한 것만 찾아요"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연극배우만으로 생활하기는 퍽 어렵다. 이들의 출연료는 월급 100만 원.
한송이씨는 "제 나이면 규칙적인 수입이 생겨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으니 힘들어요"라고 속내를 내비치면서도 "흔들리는 순간이 와도 계속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작품 하나가 끝나면 공백 기간을 이용해 단기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를 번다. 주로 하는 일은 대형마트의 명절세트 판매직인데, 일당이 8만 원이라 꽤 짭짤하다고 한다.
관객이라도 많으면 좋으련만, 공연을 시작한 지 한 달여 지난 <TAXI, TAXI>의 흥행률은 신통치 않다. 허린씨는 "무거운 주제죠, 먹고 살기도 바쁜데 문화생활을 하면서까지 아프고 싶지 않을 것 같아요"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한국 사회는 폭력적인 현실을 굳이 맞닥뜨리고 싶어 하지 않잖아요. 하지만 막상 공연을 보러온 사람들은 의외로 좋았다고들 해요. 이런 연극이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야 하는데 홍보가 부족했던 것 같아요." 한송이씨는 "연극 자체의 예술성도 있어야 하는데 대중들은 예매 1순위, 코믹하고 즐거운 것들만 찾아요"라고 지적하면서 "초대권부터 달라는 관행도 너무 당연시되어 있어요"라고 연극계의 구조적인 문제도 덧붙였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목표는 '배우다운 배우'가 되는 것이다. <TAXI, TAXI>에도 "스타가 되기보다 배우가 될 거예요"라는 대사가 나온다. 무대에서 '여자1'의 입을 빌려 소망할 때처럼 허린은 말했다.
"배우로서, 사람으로서 존중받으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