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11.04.14 21:18수정 2011.04.14 21:42
15일이면, 꼭 100일째다.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35m 높이 85호 크레인에 사람이 올라가 내려오지 않고 있다. 혹한 때 올라갔는데 꽃 피는 봄이 되어도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사측이 법원에 '간접강제'를 신청했고, 이에 법원은 크레인에서 내려올 때까지 매일 100만 원씩 내라는 결정을 내렸다. 손해배상액이 1억 원이나 됐고, 체포영장도 발부되었지만 크레인에 오른 이는 꿈쩍도 않고 있다.
100일째 85호 크레인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사람은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51) 지도위원. 김 지도위원은 "정리해고가 철회되지 않으면 내려오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지난 1월 6일 크레인에 올라갔다. 14일 저녁 전화통화에서 언제 내려 올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처음 약속대로"라고 잘라 말했다.
한진중공업 사측은 선박 수주가 안된다며 지난해 12월 15일 '희망퇴직·정리해고'를 밝혔다. 전국금속노동조합 부산양산지부 한진중공업지회는 닷새 뒤 총파업에 돌입했는데, 넉달째 계속되고 있다. 사측은 지난 2월 14일 생산직 170명에 대해 정리해고(명예퇴직 230명)와 직장폐쇄를 단행했다.
영도조선소 고공농성은 두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금속노조 문철상 부산경남지부장과 채길용 한진중공업지회장이 지난 2월 14일 50m 높이 타워크레인에 올라가 역시 내려오지 않고 있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올라가 있는 85호 크레인은 2003년 9월 9일 고 김주익 지회장이 129일간 고공농성하다 자살했던 곳이다. 8년 뒤 또 한 생명이 같은 장소에 올라가 "함께 살게 해 달라"며 목숨을 건 투쟁을 하고 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한진중공업 해고자다. 한진중공업의 전신인 대한조선공사에 용접공으로 입사했던 그는 1987년 어용노조를 규탄하는 유인물을 뿌리다 해고됐고, 당시 같이 활동했던 17명은 2003년 모두 복직했다.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보상심의위원회는 2009년 11월 '해고가 부당하다'고 판정했지만, 한진중공업은 그를 복직시키지 않았다.
지난 10일 고공농성 현장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영화배우 김여진씨와 '날라리 외부세력' 회원들이 김진숙 지도위원을 만나기 위해 온 것이다. 김여진씨는 홍익대 청소·경비 비정규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나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날 김여진씨는 85호 크레인 계단을 타고 중간 지점까지 올라가기도 했으며, 김진숙 지도위원과 전화통화를 하기도 했다.
민주노총 부산본부와 금속노조 부양지부·한진중공업지회는 '정리해고 철회'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고공농성 100일째인 15일 오후 7시30분 85호 크레인 아래에서 촛불문화제를 연다.
고공농성 100일 맞아 전화 인터뷰... "처음 약속한 대로"
고공농성 100일째를 하루 앞둔 14일 저녁 김진숙 지도위원은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 인터뷰를 통해 "처음 약속한 대로 달라진 게 없다, 정리해고 철회가 되지 않으면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김진숙 지도위원과 나눈 대화 내용이다.
- 건강은?
"괜찮다."
- 먹을거리나 잠자리 등 불편할 것 같은데?
"대충 살아야지 뭐. 100일 지나고 보니 사는 것도 요령이 생기고 적응도 되고 했다. 밑에서 생활하는 것만큼 안 되겠지만 특별히 불편함을 못 느낀다."
-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것은?
"영화도 보고 싶다. 보고 싶은 사람도 많다."
- 가족들이 걱정할 것 같은데?
"부모님들은 다 돌아가셨다. 언니 3명이 있는데 걱정하고 있다. 서울에 사는 조카가 얼마 전 온다며 대전까지 내려왔는데, 못 오게 해서 돌아간 적이 있다."
- 100일째인데 여기까지 올 것이라 예상했는지?
"나도 처음에는 여기까지 올 줄 몰랐다. 지금 소감을 말하라면 기쁘다는 것이다. 지난 겨울 추위도 견디어냈다. 스스로 생각해 보니 잘 견딘 것 같아 대견하다. 축하해 주었으면 좋겠다. 날짜 기억하고 올라온 게 아니다. 36일째 되던 날이 지나면서 날짜에 대한 강박관념이 사라졌다."
- 한진중공업 사측은 하루 100만 원씩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는데?
"15일이면 1억 원이다. 여기서 벌어서 갚아야지 뭐. 그것 때문이라도 못 내려 간다. 사측은 고소고발에다 손해배상 청구를 했고, 체포영장 발부까지 돼 있다."
- 최근 정치권에서도 한진중공업 사태가 거론되고 있는데?
"지난 11일 국회 대정부 질문 때 김황식 국무총리가 '170억원의 배당금을 나눠가지는 회사에서 정리해고는 말이 안 된다'고 했다며 사측을 비난한 것으로 안다. 영도 출신인 김형오 전 국회의장도 사측에 대해 강도 높은 비난을 한 적이 있었다. 한진중공업 사측에 이성이 한 가닥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런 지적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 정리해고자를 비롯한 조합원들도 힘든데.
"안타깝다. 지금은 버티는 거 밖에 답이 없다. 잘 버텨 주었으면 한다."
- 문철상 지부장과 채길용 지회장도 고공농성하고 있는데, 전화로 연락하는지.
"한번씩 휴대전화 문자를 주고 받는다. 그냥 '바람 많이 분다'거나 '밥 잘 먹었느냐' '잘 버티자'는 정도로 문자를 주고받는다. 특별히 할 말이 없다."
- 지난 10일 영화배우 김여진씨가 다녀갔는데.
"지난 일요일이었다. 트위터를 하는데, 한진중공업 소식을 알고 서로 트위터로 의견을 주고 받았다. 김여진씨는 홍익대 비정규직을 비롯해, 노동자와 소외된 사람들의 문제에 진정으로 관심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김여진씨가 한진중공업 사태에 대해 유심히 봤던 것 같다. 여기에 한번 오겠다고 하기에 힘들 텐데 왜 오려고 하느냐고 했다. 오히려 서울의 비정규직 투쟁 현장에 가서 격려해 주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했는데 왔더라. 저 뿐만 아니라 조합원들이 놀랐다. 그 날 이후 조합원들한테 원기가 회복된 셈이다. 조합원들은 그때가 힘든 시기였다. 사측에서 협박하고 손배가압류 나오고 하면서 조합원들이 흔들리고 있었는데, 김여진씨가 오면서 힘이 소생했다고나 할까. 기운이 다시 돋아난 것이다."
- 한진중공업 사태를 포함한 노동현안을 다루기 위한 국회진상조사단 구성을 한나라당이 거부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정치인들은 노동자들이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다. 쌍용자동차 희생 노동자와 그 가족 14명이 사망했는데, 정치권은 반성조차 하지 않고 있다. 정리해고는 우리 사회에서 되풀이 되고 있다. 한진중공업은 투쟁하니까 조합원들이 나름대로 희망을 부여잡고 있다. 그런데 쌍용자동차는 이전과 같은 투쟁이 없다보니 노동자들이 죽어나가는 것이다. 붙잡을 희망이 없으니까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그를 뽑아준 국민들을 생각해야 한다."
- 언제 내려올 건가.
"처음 약속한 데서 달라진 게 아니다. 정리해고 철회되는 날 내려갈 것이다."
- 더 하고 싶은 말은?
"조합원들이 좀 더 버티는 거 밖에 답이 없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문제들이 너무 왜곡돼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싸워보니까 무관심이 깊은 병이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여기 올라온 지 100일째다. 한 군데 더 농성을 진행하고 있고, 조합원들은 넉달 째 파업을 하고 있다. 김주익 지회장이 생각난다. 사람들은 울고불고 하는데, 모두 '무관심'이고 '망각의 늪'에 빠져 있는 게 안타깝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편지 ... "간절히 빌고 싶었습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그동안 열리는 집회 때마다 편지를 통해 입장을 밝혀 왔다. 다음은 고공농성 93일째인 지난 8일 집회 때 소개된 그의 편지 원문이다.
"어제 점심시간 아베마리아가 흘러나왔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도 부처님을 믿는 것도 아니지만 빌고 싶었습니다. 우리 조합원들 좀 지켜달라고 간절히 빌고 싶었습니다. 이 크레인을 움직여서라도 떠나는 조합원들의 앞을 가로막고 싶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저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했고, 저는 아직도 이 85호 크레인을 떠나지 못할 김주익씨의 영혼을 안고 내려가겠노라 약속했습니다.
93일이 지났습니다. 93일 동안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했습니다. 주익씨는 여기서 129일을 어떻게 견뎠을까. 그 모진 태풍을 어찌 견뎠을까. 얼마나 집에 가고 싶었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새끼들이 보고 싶었을까. 마누라한테 하고 싶은 얘기는 얼마나 많았을까. 8년 전 김주익·곽재규 두 사람의 장례를 치르면서 우리가 다짐했던 맹세가 옳았다면 더 버텨야 합니다. 8년 전 우리가 쏟았던 피눈물이 진실이었다면 죽을힘을 다해 싸워야 합니다. 수십 년 정든 동료들을 돈으로 갈라놓은 저 자본을 왜 우린 한번도 못 이깁니까. 청춘을 바친 대가를 정리해고라는 배신으로 되돌려주는 저 더러운 놈들 앞에 왜 우리가 무릎을 꿇어야 합니까.
27년. 강산이 세 번이 바뀌는 세월동안 수백 번도 넘게 저를 울렸고, 그때마다 저를 일으켜 세우고 민주노조를 지켜온 조합원 동지여러분!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여러분들을 지킵니다. 김주익 지회장이, 곽재규형이 목숨으로 지켜낸 천금 같은 우리 동지들. 끝까지 지켜낼 겁니다. 17호 크레인 아직 건재합니다. 85호 크레인 아직 까딱 없습니다. 우리 젊은 상집 동지들이 이 싸움 끝까지 지키겠다 약속했습니다. 그들을 믿고 크레인을 믿고 떠난 조합원들 다시 불러옵시다.
진수야, 세윤아, 류야, 관인아, 승욱아, 태준아, 강서야, 동현아, 지훈아, 상우야, 희찬아, 갑렬아, 형백아, 태훈아, 성훈아, 정득이 형님, 용준이 형님, 상진이 형님…. 끝까지 함 가보자. 이번엔 죽지 말고 이겨보자! 그리고 수영아, 부산구치소 수번 6039번 김수영. 힘내라.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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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 고공농성 100일째... "축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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