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례적으로 국민이 높은 관심을 보인 선거였다. 전체 평균 투표율로는 2000년 이후 역대 재보선 중 세 번째라고는 하지만, 최고 관심지역인 분당을(49.1%)과 강원도(47.5%)의 투표율이 유달리 높은 점을 감안하면, 질적으로 역대 최고치의 재보선 투표율이라고 할 만하다.
국민은 이번 재보선에 왜 이다지 높은 관심을 보인 것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 하나를 들자면, 정부·여당을 심판하려는 국민의 의지가 강했기 때문일 터이다. 그런데 과연 결과는 어떻게 나왔는가? 국민은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을 냉혹히 심판했다. 아울러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은 마치 '대첩'을 일궈낸 것처럼 보인다. 요컨대 이번 4·27 재보선은 국민의 '절망'과 '열망'이 한 데 얼크러져 표출된 것이다.
손학규의 진검승부, 차기 대권을 지향하는 의미심장한 징후
야권의 성과 중 최고의 것은 단연 손학규(이하 후보 직함 생략)의 승리이다. 그는 말 그대로 진검승부에서 이겼다. '분당을'이 어떤 곳인가? 단 한 번도 비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된 적이 없는 곳이다. 지난 총선에서 임태희 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71%의 몰표를 안겨 주었던 곳이다.
고가 아파트가 즐비한 정자동과 수내동이 포함되는 이 지역의 정치 성향은 지척에 위치하는 서울 강남과 거의 같다. 손학규는 그런 곳에 과감하게 출사했다. 그리고는 지난 총선 71%에 달했던 한나라당 지지자를 48%(강재섭 득표)로 와해시켰다. 분당을에서 등을 돌린 한나라당 지지자가 23%나 된다는 점은 한나라당 수도권 현역의원들을 가히 패닉 상태로 몰아넣을 만한 일이다.
손학규는 한나라당에서 민주당으로 건너왔을 때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보따리장수'라는 폄하를 받았던 정치인이다.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는 '손학규는 당에 있어도 춥고 밖에 나가도 시베리아'라는 야유를 받기도 했다. 그가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야권 지지자들은 그에 대해 석연치 않은 점을 지우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2009년 10·28 재선에서 평당원 신분으로 수원 장안 이찬열 후보의 선대위장을 맡아 분투하여 당선시켰고, 작년 6·2 지방선거에서도 당을 위해 사심 없이 기여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번에 한나라당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분당을에 당 대표로서의 위상 따위를 따지지 않고 주변의 만류를 마다하고는 스스로 위험을 선택하여 끝내 성공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차기 대선의 당내 경쟁자인 정동영 의원, 당외 경쟁자인 박근혜 의원 등과는 분명히 대비되는 강점을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그는 이번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100명의 현역 의원을 동원하여 총력전을 펼치는 가운데 분투했다. 그는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의 지원 제의를 고사했다. 뿐만 아니라 틈을 내서 강원도 최문순 후보까지 지원하여 그의 당선에 의미 있는 일조를 했다. 이런 모든 점들은 그가 의외로 탁월한 정치 감각을 지녔다는 방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보따리장수'도 아니며 '시베리아'는 더욱 아니다. 그는 투표 직전에 외쳤다. '이명박 정부로는 안 되겠다 싶으면 자기에게 표를 달라'고. 그가 야권에서 가장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로 부상했다는 것은 이제 주지의 사실이 되었다.
세 가지를 한꺼번에 거부한 '강원도의 힘'
이번 선거에서 여권이 당한 최악의 돌발사고는 강원도에서 발생했다. 엄기영은 인지도나 세속적 평판 면에서 최문순을 압도하는 인물이었다. 바꿔 말해 최는 엄의 명실상부한 후배였던 것이다. 최는 엄의 고교 후배(춘천고)이자 직장 후배(MBC)이다. 여론지지율도 최가 엄에게 시종일관 밀렸다. 두 후보의 간격은 그들의 나이 차(5년)처럼 도저히 극복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웬 걸, 엄기영이 나가떨어지는 이변이 벌어졌으니 '최악의 돌발사고'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최문순에게는 다소 섭섭한 말이 될 수도 있겠으나, 그의 승리는 대부분 엄기영의 실수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그는 패착과 실착을 거듭했다. 그는 속된 말로 '뻘짓' 때문에 진 것이다.
엄기영은 MBC 시절 보인 성향과는 다르게 한나라당을 선택한 것이 첫 번째 패착이었다. 그는 삼척 원전 문제에 대해 말을 바꿨다. 그는 박근혜가 참석한 행사에서 큰절을 올리기도 했다. 그는 난데없이 후배에게 '천안함 입장이 뭐냐'고 물음으로써 색깔론까지 제기할 정도로 대담함(?)을 실증해 주었다.
와중에 불법콜센터가 적발되었다. 이에 대해 그는 평창올림픽 유치가 어려워질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런 발언은 그가 정치에 관한 한 치졸한 아마추어임을 여지없이 내보인 것이다.
최문순은 투표 직전 절박하게 호소했다. '두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두 사람의 철학이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 달라'고. 급기야 강원도민은 엄기영의 '삶과 철학'을 더 이상 신뢰할 수가 없게 되었다.
차제에 강원도민은 오만하고 무능한 MB의 악정까지 심판하기로 작심했다. 게다가 이것은 다른 데로 불똥이 튀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강원도의 힘은 최전방 양양 자치단체장에서 한나라당을 대패시켰다.
'강원도의 힘'의 파장은 박근혜 의원에게까지 미쳤다. 말로는 선거에 개입 안하겠다고 하면서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강원도의 엄기영 하나만을 선택한 박근혜에게도 타격을 입혔다. 결국 '강원도의 힘'은 엄기영의 '뻘짓'과 MB와 박근혜를 거부하는 양상으로 분출된 것이다.
김태호의 승리, 유시민의 기교와 절망
김해을 선거는 '또 하나의 이변'이었다. 이 싸움에서는 일단 김태호의 선전을 인정해 주어야 할 것 같다. 그는 초반 거의 20%포인트 정도나 밀리고 있던 판세를 끈질기게 따라잡고 역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봉수의 패배를 노무현 전 대통령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은 세심한 분석이 아니라고 본다. 김해을 유권자는 노무현을 소외시킨 것이 아니라 유시민을 소외시킨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시민의 맹목적(?) 지원으로 야권 단일후보가 된 이봉수는 줄곧 '노무현 정신 계승'을 복창했다. 그러나 김해시민은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같다. 이봉수의 후견인 유시민은 노무현과 동질의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김해시민은 투표로 행사한 것이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후보가 김경수 봉하재단 사무국장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은 엄기영이 만약 민주당으로 출마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지를 상정해 보는 것만큼 간단한 일이다.
유시민은 야권 단일화 과정에서 지나친 기교를 부려 절망을 자초했다. 우선 그는 시민단체와 척을 지었는데 이것은 사려 깊지 못한 처사였다. 그는 단일후보만 쟁취하면 당선은 '떼 놓은 당상'이라고 간주했던 것 같다. 유시민은 자기 자신과 노무현을 너무 믿었고, 이봉수는 유시민과 노무현을 너무 믿었다. 반면에 김태호는 시종일관 유권자를 믿은 것 같다.
야권연대의 힘 입증한 민노당의 약진
전남 순천에서 민노당의 김선동이 낙승을 거둔 것은 야권연대의 힘을 입증한 사례이다. 민노당은 울산 동구의 자치단체장 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을 이김으로써 야권연대의 힘이 영호남을 가리지 않고 행사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중산층이 많이 사는 울산 중구에서도 민주당 후보가 아주 근소한 차이로 석패했을 정도로 분전한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무엇보다도 호남에 진보의 교두보가 구축된 것은 뜻 깊은 일이다. 이번 기회에 진보진영은 냉연히 깨달아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당분간 한국의 진보정당은 민주개혁세력이 힘을 발휘할 때야 비로소 동반성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진보정당의 경쟁자는 아직은 보수·수구정당인 한나라당이지 민주개혁을 표방하는 민주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진보정당의 의회진출이 가장 활발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하겠다. 이런 점에서 비범한 인물이 적잖이 소속돼 있는 진보신당이 지금은 존재감조차 무색해진 것은 야권연대를 경시했거나 백안시한 자업자득임을 부끄럽게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
MB 정권의 험난한 말기와 차기 박빙 승부 예고한 전초전
4·27 재보선의 가장 큰 의의는 차기 총선과 차기 대선에서 보수 대 진보의 대결이 박빙의 승부를 형성할 것이라는 점을 예고했다는 데에 있다. 이명박 정부의 임기 말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레임덕의 가속화는 명약관화한 일이다. 박근혜 의원 진영의 보신책과 거리두기 역시 약발을 지속할 수 있을지 미지수이다.
이런 가운데 정부·여당이 풀고 넘어가야 할 난제가 산적되어 있다. 공정거래법 개정 문제, KBS 수신료 인상 문제, 한·유럽연합 FTA 문제, 한국토지주택공사 지방 이전 문제, 과학벨트 선정 문제, 감세정책 철회 여부 문제 등등… 현안에 부닥칠 때마다 이명박 정부는 고전을 면치 못할 터이고 박근혜 의원은 이전보다 거세게 입장 표명을 요구당할 것이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서 야권 입장에서는 이제야 작은 희망의 불씨 하나를 지핀 정도이다. 한국의 보수·수구 세력은 의외로 강고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역감정이라는 망령은 여전히 이 땅에서 부유하고 있다.
원래 재보선이란 여당의 무덤이라고 하지 않는가? 87년 민주화 이후 2009년 초까지 재·보선에서 여당은 18 : 62로 일방적인 패배를 기록했다. 야당의 승률이 77.5%에 달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야당의 승리가 아니라 여당의 패배였다. 요컨대 야권의 승리는 대부분 정부·여당의 악정에 반사된 이익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이번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4·27 선거는 한국 재·보궐선거의 전형성을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2011.04.28 16:13 | ⓒ 2011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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