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만 열사 망월동 묘역과 유가협에 전시되어 있는 조성만 열사의 영정 사진. 처음 본 그의 얼굴은 참으로 선한 미소였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1990년 1월 추운 어느 날, '조성만'이란 이름을 처음 만났다. 태어나 처음으로 광주 망월동 묘역을 찾은 날, 겨울이라 일찍 해가 저무는 그 묘역에서 나는 깔끔한 인상의 그를 영정으로 처음 보았다.
1964년 12월 13일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1988년 5월 15일 서울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 위에서 할복,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조성만. 묘지 앞에 놓인 영정 속 그의 미소는 잔잔했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갖가지 이유로 죽임을 당하고, 또 죽음을 선택하는 비극이 계속되던 그 시절. 조성만의 죽음 역시 많은 이들에게 크나큰 아픔과 상처로 남았다.
그 후 조성만을 다시 만난 곳은 유가협이었다. 1993년 3월, 당시 나는 '전국 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유가협)'에서 간사로 일을 시작했다. 유가협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열사들의 가족이 모여, 먼저 간 이들이 못다 이룬 민주화와 통일을 이루고자 만든 단체다.
유가협 사무실 한쪽 면은 열사들의 사진으로 가득했다. 조성만은 웃는 듯 아닌 듯한 흑백의 얼굴로 그곳에도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조성만이 왜 그처럼 짧은 스물네 해를 살고 사진 속의 미소로 남았는지 알게 됐다.
할복 투신한 조성만... 그는 성직자를 꿈꾼 청년이었다1988년 5월 15일 오후 3시 40분께, 서울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 한 청년이 섰다. 그날 1980년 5월 광주를 피로 물들인 전두환·노태우를 규탄하는 행사가 준비되고 있었다. 행사 참가한 이들로 분주하던 그때, 한 청년의 외침이 울려 펴졌다.
"공동올림픽 개최하여 조국통일 앞당기자!""민주인사 가둬놓고 민주화가 웬말이냐!""분단 고착화하는 미국놈들 물러가라!" 이어 하늘 위로 5월 꽃잎처럼 유인물이 흩뿌려졌다. 많은 이들이 "안 돼!"라는 비명을 내지르기도 전에, 조성만은 칼로 자기 배를 그어 할복한 후 교육관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찰라였다. 비명과 흐느낌, 울부짖음과 충격으로 명동성당 들머리가 들썩였고 어떤 이들은 실신했다.
떨어진 이는 조성만이었다. 투신과 함께 뿌려진 유인물에는 그가 목숨을 던져 이 세상에 남기고 싶었던 외침이 고스란히 담겼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으로 시작하는 이 유인물에서 조성만은 "척박한 땅, 한반도에서 태어나 인간을 사랑하고자 했던 한 인간이 조국통일을 염원하며 이 글을 드립니다"라고 적었다.
누군가는 말했다. 왜 죽느냐고. 살아서 싸우지 않고 목숨을 버리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그리고 자결 행위를 찬양하고 미화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도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자살을 택한 이들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게 있다.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 민중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불의한 권력에 굴복할 수 없는 뜨거운 마음과 절박함이 그것이다. 그 절박함을 끌어안고 가장 소숭한 목숨을 스스로 끊어 짧은 외침을 남긴 이들이 바로 민주화열사들이다.
조성만 역시 그러했다. 그는 신부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신부가 되지 못했다. 심지어 그가 자살했다는 이유로 장례미사조차 이뤄지지 못했다. 하지만 조성만과 함께했고 그의 유서를 읽은 많은 이들은 알고 있다. 조성만이 또 다른 예수의 길을 걸어갔다고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떠오른 아버님, 어머님 얼굴. 차마 떠날 수 없는 길을 떠나고자 하는 순간에 척박한 팔레스티나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한 인간이 고행 전에 느낀 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새롭게 태어난 조성만에 관한 기록 <사랑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