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추석연휴인 9월 21일, 갑작스럽게 서울과 경기 지역에 내린 폭우로 광화문 근처 도로가 물에 잠기는 등 피해가 발생했다. 사진은 '광화문 견인차들이 도착해 물에 잠긴 차들을 한 대씩 견인하는 중' (3755님이 엄지뉴스에 전송해주신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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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추석은 공포의 절정이었다. 추석 전날 연휴를 맞아 고향에 내려가 있었는데, 텔레비전 뉴스에서 서울에 큰 비가 내려 광화문광장이 어른 무릎 높이만큼 물에 잠겼다고 했다. 또 주택가 곳곳이 침수됐다고 하면서 으레 '그런' 장면들을 보여줬는데, 이런 우리 동네였다! 화면 아래로 흐르는 자막에 우리 동네, 옆 동네, 윗동네, 아랫동네 등 아무튼 우리 집 둘레 동네 이름이 다 나왔다.
혼이 쏙 빠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빨리 집주인한테 전화해 보라고 하셨지만, 집주인은 그냥 집세 받다가 집값 오르면 금방 팔아치우려고 산 사람이었다. 동네 아는 사람에게 한번 가 봐 달라고 부탁하려 해도, 명절이라 서울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엄마는 걱정돼서 "저거 방 얻을 때 돈 보태 주고 땅 위로 얻으라 할걸"하고 울먹거렸다. 결국 그날 밤을 거의 뜬눈으로 지새우고, 다음 날인 추석 아침 차례를 지내자마자 서울로 올라왔다.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면서, 이게 사람 사는 건가 싶었다. 고향에서 집을 구했으면 방 두 칸짜리 연립주택 2층을 얻고도 남을 돈으로 서울에서는 지하 단칸방 신세를 면치 못한다니. 내가 무슨 영화를 보자고 아등바등 이런 도시에 '삐대고' 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며 마음을 비우고 집에 와 보니... 아, 멀쩡했다. 문 앞 신발 벗는 곳에 살짝 물기가 비치는 정도였다.
정말 다행이었지만, 허탈하고 비참한 마음이 들어 옷도 안 갈아입고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고향에 있는 가족들과 맛도 다 못 본 명절 음식들이 생각났다. 명절이라 식당도 다 문을 닫았는데, 어디 가서 점심을 먹어야 하나. 떨어져 사는 가족들이 다 모여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어야 할 명절에, 나는 편의점 도시락을 사서 지하방에서 혼자 먹었다. 엄마한테 방은 무사하다고 전화를 했지만, 내 마음은 무사하지 않았다.
그래서 올여름을 앞두고 결단을 내렸다. 계약 기간이 아직 9개월이나 남았지만, 중개 수수료를 물더라도 이사를 하기로 말이다. 5월 초에 부동산에 방을 내놓았다. 이 방을 빼고 새 방을 구하면 중개 수수료로만 40만~50만 원쯤 깨지겠지만, 그 돈을 잃더라도 장마철이 오기 전에 반드시 땅 위로 올라가겠다고 다짐했다.
방 구경도 않고 떠난 '모델녀'바로 집을 보러 오겠다는 연락이 와서 다음 날 저녁 시간으로 약속을 잡았다. 일찍 퇴근하고 집에 와서 서둘러 청소도 하고 가구를 옮겨서 곰팡이 핀 곳을 절묘하게 가렸다. 도착했다는 부동산 아줌마의 전화를 받고 집 앞으로 나가 보니, 오오,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모델처럼 예쁜 여자가 아줌마랑 같이 와 있었다. 앞장서 건물 현관으로 들어와 지하로 가는 계단을 대여섯 발짝 내려갔는데, 아줌마가 탄성을 질렀다.
"어머, 지하였어요? 저는 4층인 줄 알았어요!"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상하게, 화가 나기보다는 창피했다. 현관 앞에 멀뚱히 서 있는 두 사람을 올려다봤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모델녀'의 표정이 '어우, 이런 데서 어떻게 살아' 하는 것만 같아서 정말 창피해 죽을 것만 같았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고, 어떤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그냥 "예. 가 보세요, 그럼" 하고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 뒤로 3주. 아무도 집을 보러 오지 않았다. 태풍이 하나 둘 올라온다는 소식도 들리고 올 장마는 더 길고 '빡쎌' 거라는 예보도 나온다. 옆 방 아저씨는 아무리 비가 오고 배수구가 막혀도 "설마 잠기기야 하겠습니까" 하면서 속 편하게 잘만 사는 걸 보면, 확실히 내가 겁이 많아서 '오버'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두렵다. 값나가는 세간붙이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내가 매일 하루를 끝맺고 또 시작하는 이곳이 잠깐이라도 물에 잠긴다는 것은 단순히 물적 피해로 집계될 수 없는 무거운 절망을 몰고 올 것 같다.
6월 중순이면 장마가 시작할 것이다. 과연 나는 그전에 이 '궁상'과 이별하고 '땅 위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아차, 갑자기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이따위 우중충한 글을 읽으면 어느 누가 이 방에 들어오려고 할까. 이사 가기는 글렀구나.
덧붙이는 글 | 블로그에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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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는 사람. <사다 보면 끝이 있겠지요>(산지니, 2021) 등의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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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중반 '모델녀' 앞에서 얼굴이 화끈거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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