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우 변호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1세대 인권변호사이다.
김당
그러나 민청학련 사건을 시작으로 이돈명, 조준희, 황인철과 함께 '인권 변호사 4인방'의 진용을 짠 홍성우 변호사는 이후 김지하 사건, 3.1민주구국선언 사건, NCC와 선교자금 사건, 리영희 교수 필화 사건, 서울의대 간첩단 사건, 동일방직 노조탄압 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남민전 사건,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 오원춘 사건, 부산미문화원 방화 사건, 서울대 학원프락치 사건, 민주화추진위 사건, 서울 미문화원 점거사건, 김근태 고문 사건, 대우자동차 사건,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민중교육 사건, 서노련 사건, 민미연 사건, 보도지침 사건, 사노맹 사건 등에 이르기까지 1970~1980년대의 거의 모든 공안-시국사건을 변호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 1970년대에 이병린 변호사와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에 참여하고, 1980년대 들어서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에서 변호사 165인 명의로 재정신청을 내는 등 인권변론 역량의 최대치를 구현해 불의한 권력과 싸우고, '정법회'외 '민변'을 결성해 대표간사를 맡고, 마침내 전두환-노태우를 내란죄로 고소함으로써 고소시효에 대한 해석의 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 1980년대 시국사건 중에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김근태 고문, 박종철 고문치사와 함께 5공정권의 대표적 폭압 사건입니다. 변호사 9인이 직접 고발장을 내고, 165인이 재정신청한 사법사에서 유례없는 사건인데 김수환 추기경의 편지를 동원한 '언론플레이'가 있었더군요. "그때는 정말 적극적으로 활동할 때였죠. 변호사가 고발한 건 저도 처음이었는데, 이건 소극적으로 대처할 사건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대처를 했죠. 그때 변호사를 고발인단으로 구성하는 것은 조영래, 이상수 변호사 등 젊은 변호사들이 아이디어를 냈던 걸로 기억돼요."
- 그때는 김상철 변호사도 같이 하지 않았나요?"김상철 변호사가 김근태 고문 사건까지는 열심히 같이 했죠. 김수환 추기경을 동원한 '언론플레이'도 김 변호사 아이디어였죠. '권양한테 용기를 잃지 말라고 편지를 한 장 써주시면 우리가 전하겠습니다'라고 추기경께 말씀 드려 친필 편지를 받아 권양을 면회하기 전에 기자들한테 알려 처음으로 권양 문제가 언론에 보도되었죠. 그걸로 촌철살인의 효과를 냈어요. 당국의 공작으로 여러 가지 말이 돌아다닐 때에, 누가 봐도 추기경이 권양의 손을 들어준 것이죠."
홍 변호사는 우리나라가 반공 이데올로기가 심하다보니 인권운동을 함께 했던 변호사들이 나중에 떨어져 나간 경우가 적지 않다고 본다. 또 더러는 좌파 성향의 학생운동을 겪고선 '이게 아닌데'라며 돌아선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그런 진보적인 경향은 민청학련 때도 있었어요. 민청학련 강령을 읽어보면, 어떤 대목은 무시무시해요. 따지고 보면, 그 전에 학생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도 학생들의 급진적 성향은 있었어요. 4·19 직후에 '가자 판문점으로' 그랬잖아요. 학생운동이 위험하다기보다는 당시의 건강한 운동정신의 하나라고 저는 이해를 합니다."
"공산주의 생각을 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생각을 처벌하나?"
- 대담집과 대비되는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의 책과 발언이 역시 화제입니다. 최근 출간한 <보수가 이끌다-한국 민주주의 기원과 미래>에서 "(박정희 시대 좌익운동과 관련해) 당시 수사기관에 발각돼 조사 발표된 대부분의 보도내용은 기본적으로 사실이다"면서 민주화운동 명분 하에 공산혁명을 지향했던 일부 좌파세력 이제는 인정하고 반성해야 좌우소통이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논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그 분이 지적한 5개 사건 중에서 2차 인혁당 사건이 민청학련사건과 관련된 거예요. 대담집에도 언급했지만 이철 그룹의 학생운동과 대구의 인혁당 그룹은 검찰이 억지로 가져다붙인 것이어서 우리는 서로 떼는 작업을 했아요. 민청학련 지도부가 이철한테 경북대 학생회장 출신인 여정남을 통해서 대구 혁신세력의 지시를 받아 학생운동을 조직했다는 건 말도 안돼요. 자존심 문제입니다.
그래서 황인철 변호사와 나는 '여정남의 지시를 받은' 것으로 붙여놓은 사건을 분리하는 작업을 했어요. 인혁당 사건 관계자에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죠.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요. 지금도 나는 우리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 같이 뒤집어쓰면 서울 학생들 쪽에도 여정남이와 같은 희생자가 나올 수 있었어요. 다만, 그 사람들이 모여서 시국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행동에 옮긴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그게 사형까지 가나요? 그 속에 공산주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생각을 처벌합니까?
안병직씨가 그 사람들이 공산주의 사회를 꿈꿨다고 단정하는 근거가 뭔지 잘 모르겠는데요. 그런 단정은 터무니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남민전' 사건인데, 남민전이 이중조직으로 돼 있었고 수뇌부는 종북주의나 사회주의 경향이 있었던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어요. 문건이 나와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사람들의 운동방식이 우리의 민주화운동 방식과는 다르잖아요. 그걸 부인할 순 없어요."
- 재벌 집을 털어서 혁명자금을 조달하려던 방식을 말하는 거죠?"(웃으며) 자금조달을 하지도 못했어요. 남민전 사건에 대해서는 안병직 교수가 그렇게 이야기 할 만한 소지가 있죠. 남민전 사건을 변론하면서도, 기본적인 자세는 이건 소위 '아류 운동권의 돌출적인 움직임이다' 그렇게 봤어요. 실제도 그렇고. 남민전의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이 민주화운동 주류에 있던 사람은 아니에요. 경북지역 혁신계 사람들이 시작한 거고, 가담의 정도가 다릅니다.
다른 시국 사건은 변호할 때 '애국충정에서 나온 건데 학생들이 잘못한 게 뭐가 있느냐' 이런 입장이었고, 학생들과 지식인들의 용기나 신념을 보호해주고 북돋아주는 것이 변호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런 사건을 맡으면 굉장히 곤혹스럽죠. 하지만 이런 사건도 군부독재가 심화되는 과정에서 이런 돌출적인 운동이 나올 수 있다, 그런 입장에서 최대한 변론을 할 수밖에 없죠."
- 민청학련 사건부터 숱하게 많은 시국 사건을 맡아오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거나 인상적인 의뢰인을 꼽는다면?"그런 질문이 참 곤혹스러운 건데 한두 사람을 꼽을 순 없고요. 사건을 꼽는다면 우리가 제일 공들여서 하고 열심히 하고, 힘들게 한 건 김지하 사건 같은 게 있고요. 부산미문화원방화 사건도 있어요. 그야말로 난이도가 높은 사건이에요. 반공법, 국보법 위반으로 몰린 사건을 변호하고 풀어내는 게 쉽지 않아요. 그래서 힘도 많이 들였고 그랬죠.
그리고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부터는 학생운동이 상당히 과격해졌습니다. 1980년에 광주항쟁이 일어나고 광주가 무참히 진압되는 과정에서 많은 인명이 희생되고. 그러고 나니 자연스레 학생운동이 과격해질 수밖에 없었죠. 그때는 미국까지 광주학살에 동조하고 미국의 협조와 묵인아래 이뤄졌다고 보았으니까 반미 성향이 그때 나타난 것이거든요. 군부정권을 끝내기 위해서는 무력도 배제할 수 없고, 혁명의 방법밖에 없다는 학생운동의 논리가 정립된 것이죠."
"1997년 이회창후보 중앙선대위원장 맡은 건 개인적 인간관계 작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