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촌놈'에게도 상처는 있었다

[서평] <촌놈, 쉼표를 찍다>... '시골 찬양'이 아니어서 울림 깊네

등록 2011.05.31 16:08수정 2011.05.31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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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송성영 시민기자가 쓴 <촌놈, 쉼표를 찍다>
오마이뉴스 송성영 시민기자가 쓴 <촌놈, 쉼표를 찍다>삶이보이는창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언제부터 우리는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것, 더 비싼 걸 찾게 되었을까?

인도 여행을 갔을 때 일이다. 필요한 물건을 하나씩 추리다 보니 어느덧 배낭이 한 짐 가득하다. 갈아입을 옷, 세제, 세면도구, 휴대전화, 충전기, 카메라, 여분의 배터리와 메모리 카드, 자물쇠, 고추장, 심심함을 달래줄 책 한 권, 메모장 등. 이대로라면 짐 무게에 눌려 여행은 고행이 될 것 같았다. 욕심을 버리고 하나씩 비우니, 정말 필요한 건 여권과 지갑 정도랄까?


이 복잡 다난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늘 옳은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특히, 바쁘게 산다는 것이 꼭 방향의 올바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프랑스 작가 피에르 쌍소가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통해서 설파했듯이, 사포날처럼 빼곡하게 일정을 소화하는 것이 그만큼의 가치를 나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여유부리는 게 꼭 게으르다거나 무가치한 시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처럼, 더 많은 가치를 나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징검다리일 수 있다. 

송성영이 쓴 <촌놈, 쉼표를 찍다>(삶이 보이는 창 펴냄)는 이러한 나의 생각에 더욱 확신을 하게 해줬다. 자칭타칭 "글쓰는 농부" 송성영이 도시생활을 접고 시골에서 느낀 느림의 미학은 내 마음에 적지 않은 동요를 일으켰다. 

'느림의 미학'에 상처를 더한 <촌놈, 쉼표를 찍다>

경제성만 따지면 바로 때려치워야 할 농사일이 돈은 못 갖다 줘도 어떻게 사람을 엮어주는지, 남들을 짓밟고 올라가야만 하는 세상에서 바보같이 남에게 양보하는 삶이 꼭 손해만은 아니라는 사실들을 나에게 진하게 알려줬다.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묶은 산문집 <촌놈, 쉼표를 찍다>에는 주로 농촌생활이 가져다준 변화를 보여준다. 알렉산더 대왕이 잘라버린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처럼 얼히고설킨 게 인생사라 농촌생활은 그저 농촌 안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세상 흐름이 농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따라가다 보면, 결국 비정상적인 세계화의 흐름에 왜곡된 농촌의 모습이 서글프게 다가온다.


글을 읽다 보니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이 떠올랐다. 집이든 학교에서든 외롭게 지내는 마사오라는 아이가 가출해서 만난 기쿠지로 아저씨와의 여행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바라본다는 내용이다. 이 안에는 동화 같이 맑고 순수한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영화의 끝에서 아이는 결국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엄마는 이제 더는 자신만의 엄마가 아니라는 씁쓸한 사실과 함께 외로움이 그대로 남아 있는 집으로 말이다.

결국 현실 자체를 회피할 수는 없다. 여행은 언젠가는 돌아와야 하므로 여행이다. 하지만 <구운몽>에서 일장춘몽을 꾸고 깨어난 성진이 현실로 돌아와 새로운 깨달음을 얻듯이, 그 아이는 현실로 돌아왔지만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살 것이다.


만약 <촌놈, 마침표를 찍다>가 꿈 같은 농촌생활을 아름답게 그리기만 했다면 마음속 깊은 여운은 덜했을 것이다. 책에서 한적하고 고요한 농촌의 삶은 냉엄한 현실 속에서 다시 한 번 분석되고 파헤쳐진다. 현실은 냉혹하다는 사실을 각인시키면서 말이다.

충남 공주에서 텃밭을 일구며 살던 농부 송성영은 호남고속철도 사업 탓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마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철거민 가족이 그랬듯이 말이다. 한국에서는 부동산이 최고라는 생각에 '고라니의 숲'을 밀어버린 부동산 투기업자에게 울분을 표하는 '촌놈' 송성영의 모습은 아직도 끝나지 않는 막개발이 우리에게 남긴 시름이다.

 봄날, 마당에서 캔 냉이를 다듬는 송성영씨 부부.
봄날, 마당에서 캔 냉이를 다듬는 송성영씨 부부. 송성영

여전히 계속되는 개발지상주의가 망나니 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면, 세계 최대 종자업체 '몬산토'나 '신젠타 종묘' 같은 외국계 기업이 씨앗을 가지고 치는 장난은 소리 없이 다가오는 죽음의 바이러스다. 한 번 재배해 파종한 작물로는 다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씨말리기 기술', 특수한 농약이 아니면 싹이 트지 않도록 하는 기술은 생명에 대한 난도질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아름다운 농촌생활이 현실 같은 꿈이라면, 그 옆에 마주한 서글픈 세상은 악몽 같은 현실이다.

다만 판도라가 상자를 닫았을 때 마지막에 그곳에 남은 것이 '희망'이었듯, 시골 농부 송성영은 '고작' 시래기국밥과 겉절이로 활용할 수 있는 쭉정이 배추를 보면서 희망을 노래한다. 비록 거친 세상의 벽과 부딪히기에는 무척 작은 결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희망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 속의 시지포스는 끊임없이 돌을 언덕 위로 굴려야 하는 형벌을 받았지만, 정작 힘든 것은 무거운 돌을 굴리는 노동보다는 돌이 다시 내려오고야 말 것이라는 허무함과 체념이었다. 조금이라도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는 한, 우리는 앞으로도 돌을 계속 굴릴 수 있다.

'촌놈' 송성영의 삶은 그걸 증명한다.

촌놈, 쉼표를 찍다 -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명랑 가족 시트콤

송성영 지음,
삶창(삶이보이는창), 2011


#송성영 #산문집 #촌놈 #농촌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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