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생가
정만진
노천명의 수필 '나의 20대'에 보면 그는 스스로 '그때 이 나라에선 하나밖에 없었던 여자로서 최고학부를 나오자 모 신문사에서 금방 데려갔고, 여기서 일을 하는 한편 나는 나이팅게일이 노래를 토하듯 쉴 새 없이 시를 토했으며, 또 용정이니 북간도니 연길 등지로 한 바퀴 여행하고 와서는 <산호림>이라는 처녀시집을 내놓았다. 당시 내 눈은 머언 데로, 높은 데로만 주어졌고, 눈앞에 있는 것들은 웬일인지 마땅치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1945년 2월 25일 노천명은 매일신보 출판부에서 제 2시집 <창변窓邊>을 발행한다. 당시는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일제의 말상정책이 막바지에 이른 혹독한 시절이었는데도 그는 한글판 시집을 간행했다. 시 한 편을 읽어본다. '촌경村景' 전문이다.
구릿빛 팔에 쇠수랑을 잡고밭에 들어 검은 흙을 다듬는 낫보기 좋은 낡은 초갓집 영마루엔봄이 나른히 기고......울파주 밖으론살구꽃이 흐드러지게 웃는다노천명이 '사슴'이나 '촌경村景' 같은 시만 썼다라면 얼마나 좋을까. 일제말 암흑기에 한글판 시집까지 낸 그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부일시(附日詩)를 발표하여 지금껏 지탄을 받는 신세가 되고 만다. '싱가폴 함락' 일부를 보자.
우리들이 내놓은 정다운 손길을 잡아라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에일장기가 나부끼고 있는 한 너희는 평화스러우리1945년 해방이 오고, 그는 10년에 걸친 기자생활을 청산한다. 그런 노천명에게 다시 생의 위기가 닥쳐온다. 1950년 전쟁이 나자 '반역 문화인'으로 몰려 투옥된 것이다. 징역 20년 언도. 한때 언니의 집에서 하숙을 했던, 당시 경무대 비서실장 김광섭 시인이 김상용 코리아타임즈 사장 등과 연기명 진정서를 제출하여 6개월 뒤 풀려나기는 한다. 그러나 '머언 데, 높은 데'만 바라보던 노천명에게 이 투옥은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의 유명한 시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는 이 영어(囹圄) 생활의 소산이다. 생애 마지막 시집인 <별을 쳐다보며>에는 20여 옥중시편이 '囹圄에서'로 분류되어 있는데,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도 그 중의 한 편이다.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초가지붕엔 박넝쿨 올리고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심고들장미로 울타리 엮어마당엔 하늘을 들여 놓고밤이면 별을 안고부엉이가 우는 밤도 외롭지 않겠소기차가 지나가는 마을놋양푼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삽살개는 달을 짖고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노천명의 삶의 굴곡을 모르고 읽으면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는 단순한 전원풍 자연시이다. 그러나 알고 읽으면, 높은 '이름'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이처럼 절망적으로 노래한 시를 다시 찾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자연생활을 동경하고 현실의 부대낌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탈정치적 여성의 낭만 가득한 순수시가 아니라는 말이다.
고독을 사랑하여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부일시를 쓴 이력 때문에 역사에 부끄러운 이름을 남긴 '사슴의 시인' 노천명. '사슴', '촌영村景', '男사당',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같은 주옥의 시편들만 남겼더라면 두고두고 '관이 향기로운' 시인으로 사람들의 '향수' 속에 영원히 기억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회한의 시인 노천명. 후대의 지식인들에게 나처럼 살지 말라는 반면교사의 교훈을 남긴 노천명. 오늘은 그가 이 세상을 등진 날이다. 오늘,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명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며 노천명의 시편들을 읽어본다.
46세 죽음을 앞두고 쓰여진 노천명의 시편들 |
노천명은 감옥에서 풀려난 후 '사슴' 이미지와는 전혀 거리가 먼 작품들을 발표했다. 유고시집을 제외하면 그의 생애 마지막 시집인 제4시집 <별을 쳐다보며>에는 30여 편의 전쟁시와 감옥시가 실려 있다. 일부를 읽어보면, 생애 끝부분에 서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극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 고초를 받는 것이냐 누가 알아주는 투사냐 붉은 군대의 총부리를 받아 대한민국의 총부리를 받아 샛빨가니 뒤집어쓰고 감옥에까지 들어왔다 어처구니 없어라 이는 꿈일 게다 진정 꿈일 게다 - '누가 알아주는 투사야' 전문
나와 친하던 이들 또 나를 시기하던 이들 잔을 들어라 그대들과 나 사이에 마지막인 작별의 잔을 높이 들자 우정이라는 것 또 신의라는 것 이것은 다 어디 있는 것이냐 생쥐에게나 뜯어먹게 던져 주어라 - '고별'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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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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