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빠 음악회 사진 (17)공연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은정 누나(가운데)
주동우
옅은 보랏빛으로 물든 초저녁의 하늘이 어두워질 때까지 이어지던 공연이 이제 대단원에 이르렀다. 남은 것은 오늘의 하이라이트이자… 쓰레빠 음악회에서 데뷔하는 대형 신인, 무키무키 만만수!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돌비의 멤버이자 친구 사이인 은실과 민휘가 결성한 밴드로, 무엇보다 은실이 직접 만들었다던 "구장구장구"의 경천동지할 사운드가 가히 압권. 그런 그들이 드디어 무대 위로 올라갔다.
첫 번째 노래를 시작하는데, 예상하지 못한 해프닝이 벌어졌다. 긴장을 해선지 갑자기 노래를 중단한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는데, 심지어 은실은 아주 조금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관객들의 열화 같은 성원에 힘입어 다시 도전! 산울림의 '내가 고백을 하면 깜짝 놀랄 거야'를 비롯하여 2주 만에 만들었다던 자작곡까지 멋지게 불렀다. 그녀들의 공연은 남자들에게 큰 인상을 주었는지 하헌진과 명교는 물론,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다니던 외국인 남성까지 끌어 들여 주목을 받았다. 마지막에는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고, 그렇게 쓰레빠 음악회가 준비한 팀들의 모든 공연이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으니… 우리의 밤은 이제부터 시작!
"여러분, 음악회가 끝나고 이 자리에서 뒤풀이를 할 예정입니다. 전골도 준비했으니 가지 말고 끝까지 같이 놀아요!"
사회를 맡은 현준이 내가 부탁한 대로 전골 파티에 대한 공지를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게 바로 쓰레빠 음악회의 진면목이자 내가 아침부터 식재료를 준비하던 이유이지롱! 일찍이 "가난뱅이들의 영웅" 마쓰모토 하지메가 고엔지 역 앞에서 전골을 끓여가며 술판을 벌인 일화에서 충격을 받은 나는 쓰레빠 음악회란 기획을 들을 적부터 남몰래 "공공장소 음주가무 대소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매일 같이 바닥만 내려다보며 울적한 기분으로 지나가던 거리에서 모르는 사람, 아는 사람 뒤섞여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는 술자리를 만들어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는데, 음악회 전날 은정 누나와 지완, 지혜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니 퍽 흥미로워 했다. "역장이 뭐라고 하지 않을까?" 하고 내가 넌지시 말하니 "그거 갖고 뭐라 하려나… 그냥 하자" 하고 오히려 더 대담한 반응을 보이는 그들이었다. 역시 호방하고, 불온하다! 멋져.
여기서 술? 에엥, 전골? 사람들이 의아해 하는 사이 나는 얼른 준비한 음식과 가스버너 따위를 돗자리 위에 펼쳐놓았다. 친구들과 함께 전골 끓일 채비를 하고 있자니 주변에 멀뚱멀뚱 보고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다가와 일을 도왔다. "준하 씨, 제가 뭘 하면 될까요?", "이걸 씻어오면 될까요?" 정말이지, 난생 처음 본 사람들과 함께 술자리를 갖게 될 줄 그 누가 알았으랴! 버너 두 개와 냄비 둘, 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자 무와 파, 마늘, 버섯과 어묵, 그리고 물만두 등을 천천히 집어넣었다. 그런데 버섯전골 냄비에 물을 너무 많이 넣어 낭패! 소금을 끝없이 넣어도 싱거워 결국 요리사의 자존심을 뒤로 한 채 라면 스프를 집어넣었다… 어쨌든, 맛은 보장할 수 없지만 따끈한 전골이 대충 완성되었다!
동화 '요술 돌멩이 스프'처럼 다함께 만든 요리이어서 그런지 맛보다 감동이 느껴졌다. 여전히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다가와 술을 건네고, 계란을 깨트려 전골에 집어넣고, 단편선은 자신에게 맞지도 않는 고등학생 교복을 빼앗아 입고 있고… 나중에는 공연 내내 뒤편에 앉아 있던 외국인 일행까지 합석하여 화장실 비상벨의 여성까지 옆에 앉아 전골의 만두를 나누어 먹었다! 짧은 영어를 이용하여 대화를 해보니, 자신은 불란서에서 왔으며 휴가차 한국을 찾았다는 것. (한예종 학생 중 본인의 친구가 있다는 식의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확실하지 않다) "마음은 불란서"에 있는 나와 정빈은 그녀와 술을 주구장창 마시며 별 시시콜콜한 얘기를 해댔다. 불란서 사람들은 평소에 담배를 많이 피우냐, 담배는 무엇을 가장 많이 피우냐, 영화 좋아하냐, 고다르 아냐, 얼마 전 겨울에 불란서를 갔었다… 등등. 그녀는 예의 불란서 멋쟁이답게 말보로 레드를 연신 피우며 명랑하게 대답했다.
게다가 놀라운 일이 벌어졌으니… 역 앞에서 술판을 벌였다고 화를 낼 줄 알았던 역장 아저씨가 사비를 털어 우리에게 맥주를 잔뜩 사준 것이다! 나는 정말이지, 그 모습을 보고 눈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비록 어마어마한 액수의 술값을 지불하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고, 훈시를 하려다 아무도 듣지 않자 서운해 하며 돌아갔지만) 맥주를 얻자 술자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좋았어, 이대로는 어딘지 심심하지! 하헌진이 자리를 비운 사이 내가 얼른 DJ 자리를 꿰차고 앉아 음악을 틀기 시작했다. 해피 먼데이스의 '24 hour party people'이 신이문 일대에 울려 퍼질 땐 너무 감격하여 오줌을 지릴 지경이었다.
역 앞에서 술판을 벌이다! 거기에 역장님의 맥주, 동네 아저씨의 수박 선물까지!술자리로부터 조금 떨어진 믹서 앞에 앉아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음악이 다소 시끄럽다는 지적에 소리를 줄여야 했다) 그것은 정말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모인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대화를 하고, 가만히 앉아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것도 지하철 역 앞, 고가도로 아래에서! 지나가는 행인들도 퍽 황당하고 궁금한지 걸음을 옮기면서 시선을 떼어내지 못했다. 대개는 힐끗 보곤, "별 일을 다 보겠네" 하는 얼굴로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한 여성은 잠시 자리에 멈춰 서서 우리를 보며 매우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갑작스레 떠오른 옛날 생각 때문인지, 내가 조금만 어렸어도 저 사이에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 모습은 스냅 사진처럼 선명하게 여운을 남겼다. 물론, 술자리의 아이들과 잠깐 대화를 나누더니 옆에 있던 과일 가게에서 수박 한 덩이를 사와 나누어 먹으라는 말과 함께 사라진 멋진 아저씨도 기억에 남는다. 어쩌면 저들도 외롭고, 심심하지 않았을까?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끼어 앉아 맥주 한 잔이라도 마시고 갔으면… 하고 아쉬워하지 않았을까? 우리 상사가 말이야! 빌어먹을 사회 같으니라고! 하고 속 시원히 소리라도 질렀을 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동호회 모임처럼 너무 친한 젊은이들끼리 야외에서 회식을 하고 있는 인상도 없잖아 있어, 만약 다음에 술자리를 벌인다면 지나가는 사람들도 부담 없이 자리에 합석할 수 있는 편안함과 배려를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이 술판이 우리끼리 재미있자고 하는 것도 아니고, 이 거지 같은 사회에서 외로운 사람들이 "적어도 이 순간만큼이라도" 즐거웠으면 하는 자리이니까 사람이 많을수록 좋지 않겠어? 정말이지, 나는 외로운 사람들이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광기 어린 사회에 편입하고자 기를 쓰고 노력하는 대신 주변인으로서 느끼는 소외감과 불편함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의 "느슨한 연대"가 늘어난다면,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좋아지지 않을까? 역설적으로 말이다.
물론 모든 이들이 술자리를 환영하는 것은 아니었다. 주로 불만은 주변 노점상 주인들이 터트렸는데, 특히 과일 가게 할머니는 공연 때는 흐뭇한 표정으로 잘 듣더니 나중에는 혼자 있던 내게 다가와 쌍욕을 뒤섞어가며 저주의 말들을 퍼부었다. 이는 맞은편의 테이크아웃 커피 가게 아저씨도 마찬가지였는데, 아무래도 소동 때문에 가게의 매상이 떨어졌다고 생각하여 분노하는 것 같았다.
참 어려운 얘기였다. 아무리 노점상이라도 그들의 생계가 달린 영역이고, 이는 엄연히 존중해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온갖 욕설을 혼자 들으며 마쓰모토 하지메 생각을 많이 했다. 도시와 자연을 오가며 숱한 난동을 벌인 그 역시 이런 식의 마찰을 많이 겪었을 텐데, 그때마다 어떻게 넘어갔을까? "에이, 뭘 이런 것 같고 그러슈? 할매도 같이 놀고 가요!" 하고 대강 얼버무렸을 것 같긴 한데… 어찌 보면 팍팍한 노점상 상인들의 한 단면 같기도 하고, 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