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2년만의 만남이었다. 간단한 인사만으로 끝난 첫 만남 뒤로 언젠가 꼭 한 번 긴 시간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는 100만평, 입으로 말하기는 쉬워도 전체 규모를 짐작하기 어려운 넓은 땅에 이미 제주돌박물관과 제주돌문화전시관, 야외전시관, 오백장군 갤러리 등을 만들었고, 제주전통초가마을을 조성 중이며, 또한 설문대할망 전시관 건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1944년 제주에서 태어난, 67세 청년 백운철 단장과의 인터뷰는 공원 여기 저기를 걸으며 약 3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 돌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가?
"처음에는 나무였다. 젊은 시절에는 연극을 했고, 그러다가 입대를 해 설악산에서 군 생활을 하면서 도로공사로 잘려 나가는 나무들을 보며 안타까웠는데, 마침 이웃에 말라죽은 나무의 뿌리를 채집해 내다 파는 사람이 있어서 휴가 나올 때마다 같이 산에 다니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돌도 수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돌을 등짐으로 져 날랐고, 나중에는 손수레와 마차를 이용했다. 그러다가 스물 일곱 살에 '탐라목물원'(나중에 '탐라목석원'으로 개칭)을 개원했다."
- 젊은 청년이 직업도 없이 허구한 날 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돌을 모아들이니 주위의 눈총이 따가웠겠다.
"(웃음) 맞다. 마음에 드는 돌을 발견하고는 기분이 좋아 혼자 히죽거리고 있으면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하기 일쑤였고,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딱 한 사람, 어머니만은 예외였다. 내가 가져온 돌을 보며 감탄하고 칭찬하고 기뻐하셨다. 먹을 것도 다 어머니가 대주셨지만 그런 응원이 가장 큰 힘이었다. 정말 돌에 미쳐 여기까지 왔다."
- '탐라목석원'은 제주 여행의 필수 코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돌문화공원 설립 과정을 소개해 달라.
"1999년 1월 북제주군(지금은 제주특별자치도)과 탐라목석원이 협약을 맺고, 4개의 오름에 둘러싸인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에 돌문화공원을 20년 간 조성하기로 했다. 민관 협동사업의 성공 사례로 꼽히고 있는데, 관에서는 부지와 예산에다가 공원 관리를 맡고, 나는 기획 및 설계 권한만 가지고 있을 뿐 급여는 받지 않는다. 탐라목석원에 전시했던 것을 포함해 40여년 동안 수집해 온 2만 여점을 이미 기증했다."
- 하루 일과는?
"그냥 이렇게 공원을 돌아다니는 게 전부다. 새롭게 전시할 자리를 살피기도 하고, 요즘은 한창 제주전통초가마을을 조성 중이이서 아무래도 그쪽을 많이 둘러보게 된다. 전통 초가집 가운데 한 채에 내가 살고있다. 하루 종일 돌들 보고, 숲속에 들어가 나무가지 치고, 공원 전체를 어떻게 짜임새 있으면서도 자연을 최대한 살린 공간으로 만들어 나갈 것인지 구상하고. 그러다 보면 해가 지고 잠자리에 든다."
- 돌이란 (당신에게) 무엇인가? 어떤 의미인가?
"우리가 몸 담고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이 결국은 돌이다. 물이 다 빠지고 나면 돌이 남는다. 제주가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인 것처럼, 대륙도 결국 바다 위에 떠 있는 보다 큰 섬일 뿐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돌 위에서 이루어 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돌은 곧 인생'이다."
- 앞에서 어머니의 힘을 이야기했는데, 돌에 미친 남편의 아내는 어땠을까?
"(웃음) 손수레를 밀어주시던 어머니의 자리를 아내가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지금의 내 인생을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세 명의 여인들이다. 어머니, 아내 그리고 '설문대할망'. 전설 속 설문대할망은 모성의 원형이다. 흉년에 오백 명의 아들들에게 먹일 죽을 쑤다가 죽솥에 자기를 던져 넣은 어머니, 그 어머니의 사랑에 피눈물을 흘리다 큰 바위가 되어 제주를 지키는 오백장군이 된 아들들.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 설화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돌문화공원이다. 또한 제주 사람들의 생사주거(生死住居)가 한 곳에 있으니 우리들 삶과 죽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머니께서는 돌문화공원을 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