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수. 의문의 죽임을 당하고, 주검마저 난자당했던 그가 꿈꾸었던 세상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비정규직없는세상
소식을 들은 조선소 노동자들은 분개했다. 그들은 전면 파업을 선언하고 유가족과 함께 올라왔다. 시민단체 회원, 대학생 그리고 인근 안양·의왕·군포 지역의 시민들이 자원하여 비극적으로 운명한 노동자의 시신을 지키고 있었다. 이때 난데없이 경찰 백골단이 출현했다. 그들은 병원 영안실 벽을 해머로 뚫고 들어와 박창수의 시신을 갈취해갔다. 이후 경찰이 발표한 사인은 단순추락사, 자살로 결론냈다. 그 해 6월 20일, 김진숙은 첫 번째 남자 박창수를 가슴에 묻었다.
김주익은 박창수와 함께 의정부 다락원 캠프 회의에서 체포되었지만 주동자가 아니어서 구속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동료의 죽음을 유발한 현장의 동참자였다. 김주익에게는 박창수의 삶까지 살아야 하는 것이 운명으로 봉착된 것이다. 그는 1994년 한국 최초의 선상파업인 LNG 선상파업을 주도했다가 구속되었고, 석방 후에도 끈질긴 복직투쟁으로 다시 공장으로 되돌아왔다.
김주익이 민주노조의 깃발을 다시 세우고 위원장이 된 것은 2000년 10월이었다. 그후 2002년 회사는 노사합의를 일방적으로 깨고 희망퇴직, 명예퇴직, 정리해고를 단행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다시 650여 명이 잘려 나갔다.
당시 김주익이 21년 동안 근무해서 받는 봉급은 기본급이 108만 원이었다. 각종 공제를 하고 나면 9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사측은 노조간부 110여 명에 대해 18억 원에 달하는 손배가압류를 걸었고, 김주익 등 14명을 고소·고발했으며 26명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 2002년 한진중공업은 1조 6000억 원 매출에 239억 원의 당기순이익을 냈고, 사주는 매년 50~100억 원에 이르는 배당을 챙겨가고 있을 때였다.
85호 크레인에 목을 맨 김주익... 그를 위해 투신한 곽재규사태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고 김주익의 고뇌는 깊어만 갔다. 그러던 2003년 6월 11일 폭우가 쏟아지던 새벽 김주익은 35m 상공의 85호 고공크레인으로 올라가며 말했다.
"나의 무덤은 85호 크레인이다. 너희들이 내 목숨을 달라고 하면 기꺼이 바치겠다."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김진숙만은 그의 말에서 전율을 느꼈다. 경찰은 무시로 공권력을 투입했고, 회사는 단 한 번의 교섭에도 나오지 않았다. 김주익은 2남 1녀를 둔 가장이었다. 평소 책을 손에서 놓지 않던 그였다. 크레인에서 내려가면 아이들에게 '힐리스' 운동화를 사주겠다고 약속했던 그였다. 하지만 그는 탄압을 멈추지 않으면 죽어서 내려가겠다는 세상에 대한 약속과, 내려가서 '힐리스' 운동화를 사주겠다는 가족에 대한 약속 중에서 전자를 택했다. 2003년 10월 17일, 고공크레인에 오른 지 129일째. 그는 크레인 난간에 목을 맸다. 그가 남긴 유서는 간명했다.
"나의 죽음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나의 주검이 있을 곳은 85호기 크레인입니다. 이 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나의 무덤은 크레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죽어서라도 투쟁의 광장을 지킬 것이며 조합원의 승리를 지킬 것입니다."그 약속이 뭐가 그렇게도 중요하다고, 야속하게 그는 고공크레인에 오를 때 세상에 던졌던 그 약속을 하나밖에 없는 자기 자신, 하나밖에 없는 남편,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아빠의 목숨과 한데 퉁 쳐서 바꿔 버렸다. 그리고 그는 주검이 된 채로도 고공크레인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김진숙이 '주익씨'라고 부르는 두 번째 남자는 이렇게 그의 가슴에 묻혔다.
숙련 기술자 곽재규는 당시 정리해고 대상에서 제외된 이른바 '산 자'였다. 그는 그것이 못내 부끄러웠다. 내가 주익이를 죽였다며, 김주익의 시신 없는 빈소에 아침마다 찾아가 무릎을 꿇고 눈물만 흘렸다.
곽재규는 언변은 어눌했지만 김진숙과 박창수와 김주익이 앞장서 싸울 때 늘 함께 해준 연장자였다. 그는 산업체 야간 고등학교를 거쳐 야간 전문대학까지 마친 건실한 노동자이기도 했다. 김주익이 죽고 나서도 고공크레인에서 내려오지 못한 지 보름째. 곽재규는 85호 크레인 맞은 편 도크에서 몸을 던진다. 동생의 '죽음'에 '명분'을 안겨주기 위한 또 하나의 처절한 '죽음'이었다.
곽재규는 김진숙의 가슴에 묻힌 세 번째 남자였다. 조용한 애주가였던 곽재규, 칼국수와 수제비 같은 '밀가루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는 곽재규, 그의 아내 정갑순은 지금도 길 가다 키 작은 남자만 봐도, 출근하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마주치기만 해도 그저 눈물이 난다고 한다. 그의 딸 경민이는 아버지 공장 곁을 지날 때면 아버지를 앗아간 공장을 폭파해버리고 싶다고 한다.
"아빠 다니는 회사에 처음 들어와 봤어. 가슴이 아프고 당황스러웠어. 배 만드는 공장인 줄 알았는데, 여기는 무슨 전쟁터 같이 느껴졌어. 삭막했고, 내가 생각한 것과 너무나 달랐어. 이런 곳에서 일하는 줄 몰랐어.... 아빠가 하늘나라로 가기 며칠 전에 집에 왔을 때, 어딘가 불안해 보였고, 안절부절 못해 하는 모습이었어. 창문만 바라보고 계셨지. 그때부터 벌써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지."(딸 곽경민, '아빠께 드리는 편지'에서)세 노동자의 죽음으로 이룬 승리, 그러나... 이후 광화문과 종로에서는 분노한 5만여 노동자의 격렬한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고 했던 노무현 정부는 식겁하여 등에 서늘한 땀을 흘렸다. 2003년 11월 16일 김주익·곽재규의 합동 장례가 치러졌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희한한 장례식이었다. 김주익은 35m 고공크레인에서 내려왔고 곽재규는 11m 지하 도크에서 땅으로 올라와 두 시신은 조우했다.
정부와 회사는 태도를 바꿨다. 두 사람을 기리는 추모공원이 조선소 안에 지어지고, 정리해고 계획은 백지화됐다. 아울러 사측은 차후로는 정리해고를 하지 않겠다는 합의서에 서명했다. 더불어 30억 원 들여 새 식당이 지어졌고, 노동자들의 임금과 성과급이 인상되었다.
'정리해고'라는 것은 1997년 외환위기 때 IMF에 의해 강요된 괴물이다. 당시 김대중 정부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노사정에서 합의토록 했던 데에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고 치자. 하지만 김대중 정부는 그것을 한시적인 법으로 못 박았어야 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는 뒤늦게라도 그것은 폐지하거나 대폭 개선했어야 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고 2008년 외환위기가 재발되었다. 이제 정리해고에 면역이 생긴 대기업들은 오히려 그것을 선무당 사람 잡듯이 휘둘러댄다. 그들은 정규직을 몰아내 비정규직으로 대체하는 것을 구조조정이라고 여기는 집단이다. 어느덧 비정규직은 800만 명을 넘어 900만 명에 육박하게 되었다. 잡히지 않은 숫자까지 치면 1000만 명이 넘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