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중계소에서 산성산 정상으로 올라오는 등산로가 안개에 싸여 신비로운 동양화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정만진
뿐만 아니라 앞산은 '절경'도 보여준다. 특히 비 갠 직후나 눈 멈춘 낮에 올라 청룡산 방향을 바라보면 정말 숨이 막힌다.
산에 다니면서 사진을 찍어본 사람은 안다. 비가 그치면, 눈이 멈추면 산에 올라야 한다. 왜 그런가. 비가 그쳐 안개가 피어오르면, 눈이 멈춰 하얀 백설로 봉우리와 계곡 곳곳이 새하얗게 꾸며지면, 산은 거대한 산수화로 변하기 때문이다. 조금은 어수선했던 풍경들도 한결같이 여백의 아름다움을 존중하는 동양의 산수화로 눈부시게 바뀌기 때문이다.
앞산에서는 고산골, 큰골, 용두골, 달비골, 안지랑골, 매자골 등등 숱한 길 중 어느 등산로를 선택하는 것이 산수화 감상에 가장 적격일까. 정답을 먼저 말한다면, 고산골과 큰골 사이의 임도가 바로 최적의 길이다. 다른 길들은 모두 골짜기 사이로 나 있어서 거의 풍광을 즐길 조건이 안 되지만, 통신중계소(RELAY SITE)와 항공무선표지소(V.O.R Station)로 올라가는 이 길만은 능선을 타고 오르는 까닭에 앞뒤좌우 사방의 시야가 거침없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반쯤 올라 뒤를 돌아보면, 어느샌가 올라온 길이 온통 그림이 되어 있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보는 즉시, 동양의 산수화가 왜 여백을 주는지 대뜸 알 수 있다. 여백은 빈 공간이 아니다. 그리지 않았을 뿐, 사람의 마음 속에는 무언가가 있다. 하얀 종이, 뽀얀 안개 속에도 풍경은 있기 때문이다. 그저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산을 오르면서 그것을 마음으로 보는 경험은 비가 그친 직후와 눈이 멈춘 날에만 챙길 수 있는 보석 같은 소득이다.
▲케이블카와 앞산 정상쪽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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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을 보아도 산수화는 한결같이 펼쳐져 있다. 케이블카 하행선 정류소와 앞산 정상의 첨탑은 안개에 가려 보일 듯 말 듯한 절묘의 풍경을 보여준다. 멀리 아스라한 우방타워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든 것들이 허공에 뜬 듯 신비롭게 숨어 있다. 김광균의 시 '설야'가 왜 '먼 데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는 구절을 쓰고 있는지 이제서야 이해가 된다.
가느다란 숲길 사이에 가득찬 안개를 맞으며 걸어가는 기분 또한 이렇게 비가 그친 때가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유쾌한 소득이다. 흰빛도 아니고 회색도 아닌 반투명의 안개는 나무의 둥치며 껍질과 어우러져 선계(仙界)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게다가 얼굴에 와닿은 깨소금 가루 같은 물방울들은 예까지 올라오느라 땀을 흘린 등산객의 갈증조차 말끔히 해소해 준다.
▲물안개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등산로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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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에서 한 시간 가량 오르면 왼쪽으로는 산성산과 청룡산에 갈 수 있고, 오른쪽으로는 앞산 정상에 닿게 되는 삼거리가 나타난다. 만약 오늘 같이 비가 멈춘 날 앞산에 올라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할 만한 비경을 보고 싶다면 오른쪽으로 나아가시라. 앞산 정상까지 가는 중간 지점쯤에 산불 초소가 나타나면 그 앞의 거대 바위에 올라 오른쪽을 바라보시라. 새하얗게 피어오른 산안개가 앞산 정상 아래 대덕산 봉우리와 달비골 사이를 면사포처럼 감싸고 있는 절경을 보게 되리라.
▲앞산 정상에서 바라본 대덕산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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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앞산 정상을 지나 대덕산 봉우리로 가다가 다시 거대 바위 전망대를 만나거든 거기 다시 멈추시라. 천혜의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으니 애써 적당한 장소를 찾을 필요도 없다. 지금껏 울창한 나무들로 좌우의 풍치를 가리던 기질은 깜빡 잊었는지 앞산은 손님에게 풀 한 포기까지도 앞을 가로막는 법이 없는 기막힌 전망을 보여준다. 바로 청룡산 쪽 방향이다.
'안개 핀 골짜기'로의 대구 산행, 외국산 부럽지 않네여기가 어딘가? 대구에 이같은 천하절경이 있다는 말은 들은 바가 없는데, 이게 어찌 된 절경의 출현인가. 달비골을 가득 메운 안개는 수줍은 듯 골짜기에 고이 숨은 채 피어오르고, 청룡산과 삼필봉,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산맥처럼 펼쳐져 있는 비슬산 자락 역시 흰구름에 반쯤 덮힌 채 신비감을 과시하고 있다. 핀란드나 캐나다 같은 삼림국가의 사진을 보는 것도 같고, 백두산 같은 고산준령의 운무(雲霧)가 재현된 듯한 감동에 젖기도 한다.
▲대덕산에서 바라본 청룡산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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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이 다만 아쉬운 것은 본격적인 등산을 했다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1시간 30분 이상을 걸었지만 오르막길 자체의 경사가 완만했던 탓에 '등산'이 아니라 '산책'의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청룡산의 등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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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산을 향하여 발걸음을 더 내디뎌 보자. 앞산 정상에서 5.5km를 가면 청룡산 꼭대기에 닿는다. 소요 시간은 2시간 정도. 이 길은 전체 등산로의 절반 가량이 소나무 숲으로 우거진 고즈넉한 평탄로라 굳이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좋은 길'이다. 나머지 길도 대부분 참나무 군락이라 햇살이 쨍쨍한 날에도 태양에 노출될 일은 거의 없는 천혜의 그늘 길이다. 게다가 봄철이면 진달래가 길을 따라 만발하고, 가을이면 곳곳에 보리수 열매가 붉게 달려 걷는 이의 가슴을 동심의 세계로 젖어들게 해준다.
이야기가 이렇게 되었으니, 이 길을 등산하는 장점을 말할 때가 되었다. 대략 세 가지를 들어 앞산 최고의 여정으로 추천하려 한다. 지금 말하는 '이 길'은 청룡산 정상을 거쳐 달성군 가창면 오리 양지마을로 하산하는 여정이다.
첫째, 하산의 장점이다. 관광버스를 대절한 단체등산이 아니라면 돌아올 일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이름 모를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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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마을로 내려가면 수성구 파동까지 불과 5분만에 데려다 주는 시내버스가 있다. 하산 시각과 시내버스 운행 시간이 딱 맞지 않으면 정류소 앞에 있는 동제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거나 야생화 재배장에서 꽃을 구경하면 되니, 이 길에는 '사서 걱정'을 할 일이 전혀 없다.둘째, 충분한 운동량이다. 대구 시내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총 여섯 시간에 걸쳐 산을 탈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장점이다. 특히 청룡산 정상에서 양지마을로 하산하는 길이 만만찮은 내리막이라 진땀을 흘려야 한다는 사실도 추천사에 빠뜨려서는 안 될 내용이다. 흔히 등산을 하면 오를 때 땀을 흘리고 하산시 그것을 식히지만, 이 길은 오를 때 못지 않게 하산 때에도 용을 써야 하니 운동량이 배로 늘어난다. 등산 자체가 목적이라면 어찌 이 길을 '좋다' 하지 않으리.
청룡산 정상에서 어디로 갈까? |
청룡산 정상은 헬기장이 조성되어 있다. 헬기장에서 아래로 보면 도원지가 눈에 들어온다. 앞산이나 산성산에서 이리로 온 경우, 양지마을로 가려면 헬기장을 거쳐 앞으로 계속 직진하면 된다. 그러나 수밭고개를 거쳐 계속 비슬산으로 가거나 아니면 도원지로 하산할 사람은 헬기장에서 도원지 쪽으로 나 있는 좁은 길로 들어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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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멋진 볼거리들이 기다리고 있다. 봄철에 진달래꽃 사이를 뚫고 걸어가는 기분이야 재삼 끄집어낼 필요도 없고, 가을이면 여기저기서 익어가는 붉은 보리수 열매가 황홀하다. 물론 그보다도 더 뛰어난 장점은 사시사철 싱싱한 소나무들이 하늘을 뒤덮어 푸른 그늘을 만들어 준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거칠 것 하나 없이 비슬산과 삼필봉(도원지) 방향의 전망을 만끽할 수 있는 천혜의 바위 전망대가 등산로의 중간쯤에 있고, 하산길에는 또 대구광역시 전체에서 가장 예쁜 마을이라고 할 만한 양지마을을 저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는 기막힌 기회까지 저절로 생기니 그야말로 금상첨화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