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아마추어권투 연맹전에 참석하고. 군산시 후원자들과 체육관에서 기념촬영.(69년)
조종안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프로는 '권투', 아마추어는 '복싱'으로 표현했는데, 군산에서는 전기배(전치과 원장)씨를 비롯한 안형채(만수병원 원장) 등 시민 다수가 후원회를 조직하였고, 차형근 변호사(전 국회의원)와 개정병원 이영춘 박사도 도와주었다.
60년대부터는 군산 아마추어복싱 연맹 회장으로 추대된 이영춘 박사가 스폰서 역할을 해주었다. 1968년 지금의 체육관 자리로 옮길 때도 이 박사가 계약금 5000원을 지원해주어 구입하게 되었다고. 그래서 김관장 부부는 1980년 늦가을에 돌아가신 이영춘 박사를 지금도 부모처럼 생각한단다.
자상하고 후덕한 김 관장 큰형님 말만 믿고 결혼했다는 사모님에게 살아온 얘기 좀 들려달라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권투가 무엇하는 운동인지도 모르면서 결혼식을 올리고 따라와 보니 끼니 해결도 어렵더라는 것.
"이 양반(김 관장)이 명함을 주는데 '군산 권투구락부 사범'이라고 써 있는 게예요. 뭔 말인가 했죠. 그래서 동생에게 사범이 뭐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빽도 있고, 힘도 있어야 허는 거다'고 해서 '아, 뭔가 허기는 허는 모양이구나!' 했죠. 거기에 형님들 인품도 좋고, 형제들 우애도 좋고 혀서 맘 놓고 결혼혔는디 와보니까 집도 절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 삼학동 '흑구데기'에서 살았어요. 부엌도 없는 셋집. 그러니까 쪼끔은 속은 거죠···."(웃음)생활에 쪼들려서 그렇지 남편(김관장)이 속 썩이는 일은 없었단다. 제자들이 찾아오거나 군산대 복싱부를 지도하고 있는 작은아들(김형욱: 46세)이 대회에 다녀와 "어른들이 아버지 칭찬을 입이 마르게 하면서 안부를 묻더군요"라는 말을 종종 한다며 그런 얘기를 들을 때는 "인생을 아주 헛되게 살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보람을 느낀다고.
1968년 4월에는 후진 양성과 체육 발전에 공적을 쌓은 체육인에게 주는 제6회 대한민국체육상 지도상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김 관장은 아마추어 복싱선수 출신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술회했다.
그해 4월 25일 오전 10시 문교부(교육부)가 주관하는 시상식은 많은 체육계 인사와 시민,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렸다. 당시 김 관장은 부부동반으로 참석, 상장 및 금메달과 부상으로 상금 30만 원을 받고 감격해 했다고. 사모님도 "그때 30만 원은 시골의 작은 집 한 채 값이었어요. 꿈만 같아서 눈물을 다 흘렸어요!"라며 당시 심정을 전했다.
1969년 9월에는 한국 대표팀 코치로 선발된다. 그해 9월 12일부터 일본 '고라구엥 후낙원'에서 열리는 제1회 아세아 주니어복싱선수권 대회에 출전하는 한국대표 선수 8명과 함께 일본에 다녀온 것. 김 관장은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지방 소도시 체육관 관장이 국가대표팀 코치로 추천되었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