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 타고 나들이에 나선 이들은 대구와 경남 합천, 부산 등지에서 온 원폭피해자와 2세 환우 및 그 가족들이었다. 매년 봄과 가을 자연과 문화, 좋은 만남과 이야기가 있는 여행을 국내 원폭2세 환우들을 위하여 개최하고 있는 합천 평화의 집의 네 번째 평화나들이다. 1박 2일의 여정에 30여 명이 참석했다.
원폭2세환우들의 평화나들이는 2005년 세상을 떠난 원폭2세환우 고 김형률씨(한국원폭2세환우회 설립자)가 원자폭탄에 피폭된 한국인과 그 후손인 2세 환우의 현실을 국내외에 알리고, 평화와 인권의 활동을 펼치던 시절에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원폭피해 2세 환우 인권 실태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때라, 당사자는 물론이고 관심있는 일반시민과 평화활동가들도 함께 여행하며 원자폭탄 피해에 대하여 배우고 마음을 나누며 뜻을 모으던 시절이었다.
평화 나들이는 원폭2세 환우를 위한 복지시설이나 사랑방조차 전무한 국내에 최초로 작년 3월 한국 원폭2세환우의 쉼터인 합천 평화의 집이 문을 연 뒤로 정기적인 행사가 되었다. 평소 다양한 만남과 교류, 여행과 문화체험의 기회가 부족한 원폭2세 환우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프로그램이 되었으며 함께 참여한 적이 있는 1세대와 가족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바로 앞선 봄나들이 때는 서울 남산타워와 경복궁, 한강유람선 탑승 후, 삼일절을 맞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앞에서 '핵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한 바 있다. 가을 나들이는 아직 늦더위의 열기가 남아있는 점을 고려해 시원한 강원도를 목적지로 했다.
합천에서 출발한 전세버스는 중간에 충북 제천에서 멈추었다. 먼 거리 때문에 참가자의 몸이 힘들까봐 일부러 충주호 유람 및 제천 청풍 문화재 단지 견학을 하며 충분히 쉬어가기로 한 것. 지역 식당에서 푸짐한 점심식사를 즐긴 참가자들은 난생 처음 충주호 위를 달리는 배에 승선했다. 수려한 풍광을 바라보며 지난 여름의 뜨거움을 모두 씻겨주는 듯한 바람을 만끽하느라, 왕복 1시간 30분의 유람은 지루한 줄 모르고 훌쩍 지나갔다.
여행길에 함께 한 2세 환우 중에는 시각장애인도 있고, 다리가 불편한 사람, 다운증후군이나 다른 장애를 앓는 사람도 있어, 활동이 자유롭고 비교적 건강한 다른 참가자들이 휠체어를 밀고 끌어주고 길을 잃지 않도록 함께 다니며 활동보조 도우미를 자처했다. 우울증이 심했다는 홍모씨는 오랜만의 외출에 지긋한 미소를 짓는다. 마음에 맺힌 것을 풀어내려는 듯 모두가 말수도 늘고, 노래하고, 춤추고, 사진 찍고, 음식도 평소보다 곱으로 먹는다.
버스 안에서도 엉덩이에 땀나고 허리가 욱신거리도록 지루할쏘냐. 아흔 살의 노모도 세월을 품은 민요가락을 구성지게 뽑아내고, 앞을 못보는 아들도 빼지 않고 흥겨운 노래를 부른다. 노래 못한다 못한다 내빼기만 하던 이도 전부 노래자랑 대열에 합류한다. 이날 함께 참여한 재일동포2세와 미국인 연구자도 같이 어우러져 아리랑과 신세타령을 뽑아냈다. 그 사이 버스는 이내 강원도 인제군에 도착했다. 숙소는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에 있는 DMZ평화생명동산 교육마을이다.
고요한 밤 풀벌레 소리가 찾아들 무렵, 서로 빙둘러 앉아 이야기마당이 펼쳐졌다. 지난 8월 합천에서 서로 뜻과 힘을 모아 치러낸 한인 원폭희생자 추모제 행사에 대한 이야기며, 최근 헌법재판소가 한국 정부가 한일협정 등을 맺은 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원폭피해자들의 배상청구권 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인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린 데 대하여 앞으로 어떠한 실천적 대응에 나설 것인지, 회원들이 어떻게 하면 단결하여 뜻을 모을 수 있을지 등의 진지한 이야기도 나왔다. 2일 합천 평화의 집은 한국원폭2세환우회 등 관련단체와 함께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에 대한 입장과 요구를 담아 성명서를 발표한 바 있다.
둘째날, DMZ평화생명동산 정성헌 이사장의 아침 강연을 짤막하게 듣고 이 교육마을의 일꾼들이 직접 농사짓고 있는 밭을 둘러보며 산책을 했다. 그리고 전쟁과 분단의 현장을 느낄 수 있는 을지전망대로 향했다. 민간인이 출입하기 위해서는 양구통일관에 출입신고서를 내고 군인의 동행 하에 들어갈 수 있는데 버스에 3명의 헌병이 동승하자 환우들이 아들을 생각하는 부모 마음처럼 바나나며 떡이며 한참 배고플 젊은 군인들에게 이것저것 간식을 잔뜩 손에 쥐어 주었다.
평화나들이는 마지막으로 양양의 낙산사와 의상대를 거쳐 동해 바다를 실컷 보고, 전통고찰의 멋도 한껏 느낀 뒤 다시 합천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끝이 났다. 밤이 늦어졌지만 읍내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사는 환우들을 위해 여행 내내 활동보조 도우미를 자처했던 다른 2세들과 임원들이 귀가 차량 지원 봉사까지 했다.
한 1세 피폭자는 "강호동 씨 등 유명연예인이 하는 인기 프로그램 '1박2일'은 돈 벌고 재미를 주기 위해 하는 것이지만, 어제 오늘 우리의 1박2일이 그보다 더 재미있고 보람 있었다. 축구회와도 일정이 겹쳐 그 유혹을 뿌리치고 왔는데, 축구공 차고 술 한 잔 마시는 것보다 2세들의 눈물도 보고 아픈 이야기도 듣게 된 이 시간이 더욱 소중했다."고 말했다.
살아가면서 괴로운 일도 많았고 식구도 많은 집안의 종부로 들어가 살았는데 오늘 모처럼 여행에 나섰다며 벌초 때문에 얼굴에 풀독이 올라 고생하면서도 참여한 원폭 2세대 여성도 있었고, 자식이 결혼에 차별 당할까봐 자신이 원폭 피폭자란 것이나 자식이 피폭2세라는 것도 당당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면서 눈물을 터뜨린 1세대 여성도 있었다. 저마다 가슴에 영화나 소설보다 더한 사연들이 왜 없겠는가.
지난 7월부터 합천에서 아예 여관방을 빌려 생활하고 있는 미국인 조슈아 데이비드 필자(토론토대학교 음악인류학) 교수는 한국의 전통 노래를 굉장히 사랑하여 즐기고 배우는 과정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노래 세계를 주제로 논문을 쓴 적도 있는데, 최근에는 원폭2세환우들의 노래 세계를 곁에서 듣고 보며 연구 중이다. 1박2일 평화나들이에도 동행한 그는 "'피해자'란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데, '피해자'로 불리는 이분들이 오히려 나보다 더 많은 걸 알고 계시며 지혜롭고 정도 깊으시다. 내가 오히려 부족하다고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듣고 배운다"고 말했다.
합천 평화의 집이 진행하고 원폭2세환우들이 참여하는 평화나들이는 내년 봄에는 전라남도 광주로 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이 땅의 모든 아이들이 건강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주부이자,
엄마입니다.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