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꿈의 공장>의 한 장면.
시네마달
꿈에 그리던, 김성균 감독의 음악다큐 <꿈의 공장>이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한번쯤은 글을 써야지 하다 4차 희망의 버스 준비를 한다고 내내 밀어두고 있었는데, 오늘 새벽 깨어보니 또연에게서 '내일까지는 꼭'이라는 문자가 다시 들어와 있다. 그렇지. 아무리 바쁘더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지.
그러니까, 2008년 9월쯤이었을 것이다. '기륭전자비정규직 1000일 투쟁 공동대책위'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64만 원을 받던 파견직 노동자들과 함께 그간 두 번의 고공농성과 두 번의 국회 한나라당 원내대표실 점거, 그리고 당시엔 마지막 남은 10명의 조합원들 전원이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가 있는 때였다. 희망의 버스 일을 하는 지금처럼 경황이 없을 때였다.
어느날 촛불문화제가 끝난 후, 한 노동자들이 잠깐 만나고 싶다고 찾아왔다. 어수룩하고 순박해 보이는 사람들. 그들이 콜트-콜텍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들이었다. 요지는 공장에서 쫓겨난 지 500일을 맞는데, 그 문화제를 같이 준비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부탁이었다.
사실 난감했다. 기륭 1000일도 버거운데, 이젠 콜트-콜텍 500일이라니. 가능하다면 못 들은 것으로 하고, 잊고도 싶었다. 하지만 쉽게 뿌리칠 수가 없었다. 2007년 겨울, 대전 콜텍공장에 들려 르포작업을 돕던 때, 천막에서 재정사업용 수세미 뜨개질을 하던 이들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깁슨, 알바네즈, 휀다 등 전 세계에 유통되는 기타의 1/3을 주문자생산방식으로 만들어 왔으면서도 누구 하나 기타 한 대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창문 하나 없이 꽉꽉 닫아놓은 공장 안에서 쉴 새 없이 알을 까내야 하는 양계장의 닭들처럼 시름시름 병들어 가던 사람들. 기계톱에 손가락을 잘리고, 빼빠질과 연마질로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고, 꽉 막힌 도장장에서 유기용제를 마시며 일하다 거개가 기관지염과 천식에 시달리던 노동자들. 그래도 예쁜 자개 문양을 달고 전 세계로 나가는 기타들을 볼 때면 흐뭇해하던 노동자들. 짧게는 10년, 길게는 20여 년 밤낮없이 기타만 만들던 사람들이었다.
콜트-콜텍 얘기를 사명으로 받아들인 김성균 감독며칠 후 기륭 콘테이너가 있는 골목 슈퍼 옆에서 벗들인 문화연대 원재와 유아를 만났다. 기타 만들던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문화예술인들이 함께 해결해 나가보자는 상기된 이야기였다. 지금처럼 가을바람이 선선하던 날로 기억한다. 당시 그들을 위한 국제 록페스티벌을 해보면 정말 좋겠다는 꿈을 이야기하며 잠시 서로 설레던 생각이 난다. 사진을 찍는 노순택과 노래하는 연영석, 명인, 그리고 <클럽 빵>사장 김영등과 파견미술가 모임 등이 모여 첫 회의를 하던 때가 기억난다. 지금은 인천 인권영화제 팀의 기선과 민주노동자연대 등이 참여해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그 후로 3년여, 생각해보면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김진숙처럼 이들 역시 목숨을 걸어야 하기도 했다. 2007년 12월엔 인천 콜트의 이아무개 조합원이 분신을 했다 간신히 살아나기도 했다. 고공농성도 해봤다. 양화대교 옆 강변 15만KW의 전류가 흐르는 40여m 송전탑에 올라 고공단식까지 하기도 했다. 이어진 방화동 본사 점거, 그리고 2007년의 일주일간의 콘서트, 매달 마지막째 주 수요일 오후 7시 30분이면 어김없이 홍대 앞 클럽 빵에서 열던 연대콘서트. 2008년 모던록 페스티벌. 그리고 미국, 독일, 일본 등 6번에 걸친 해외원정투쟁. 눈물겨운 일도 많았고, 기쁜 일들도 많았다.
그 모든 일을 기록해주는 소중한 벗들이 있었다. 김성균 감독과 강성훈이었다. 난 단 한번 그들에게 말을 건넸을 뿐인데, 그들은 이 일을 자신들의 어떤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그간 3년여 동안 정말이지 필름 값 한번을 줘보지 못했다. 문 닫힌 공장이 있는 대전과 인천을 오가는 동안 여비 한번, 나중엔 독일과 미국과 일본을 오가는 6번의 원정투쟁 기록 과정에서도 미안하지만 한두 차례 빼고는 항공비조차 마련해주지 못했다.
어느 해는 사진기를 팔았다고 했고, 어느 해는 카메라를 팔았다고 했다. 우리 역시 어떤 해는 콘서트 티켓을 팔았고, 어떤 해는 그림을 팔아야 했다. 간신히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여비를 맞추고 나면 땡이었다. 노동자들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보다 더 벌이가 없는 가난한 다큐작가들의 생활을 아는지라 미안하고 마음이 짠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노동자를 노예처럼 부리는 한국 부자 120위 박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