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다피 정권 붕괴 후 리비아의 운명은?

[코리아연구원] 리비아 카다피 정권 붕괴와 NTC체제 전망

등록 2011.09.09 18:38수정 2011.09.09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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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새로운 리비아의 험난한 여정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이 붕괴했다. 튀니지와 이집트에 이어 또 다른 중동의 독재 정권이 막을 내렸다. 산유국인 리비아 정권이 무너지면서 중동의 정치 및 경제 그리고 세계 경제에도 또 다른 전환점이 마련되었다. 세계 각국은 리비아 사태이후 새로운 중동 및 세계의 정치경제 질서재편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9월 1일에는 '리비아의 친구들' 국제회의가 열렸다. 60여명의 전 세계 각국 대표와 외교사절들이 리비아의 미래를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반기문 UN사무총장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 등이 참석했다. 한 때 리비아 사태에 대한 나토의 개입을 반대했던 러시아와 중국 대표도 참석했다. 리비아 재건사업에 배제되지 않겠다는 의지 표명이었다.

Ⅱ. 산유국 리비아 붕괴의 배경은?

지난 1월과 2월에 각각 혁명이 발생한 튀니지 그리고 이집트와는 달리 리비아는 산유국이다. 180만 km2에 달하는 넓은 영토에 인구 약 650만 명이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을 하던 나라다. 1959년부터 생산이 시작된 석유덕분이다. 아프리카 대륙 제2위의 석유 및 천연가스 부국으로 1인당 GDP가 약 1만 2,000달러에 달한다. 즉 생활고, 실업 등 경제적 원인이 혁명의 배경이었던 이집트 및 튀니지와는 상황이 달랐다는 것이다. 결국 리비아 카다피 정권 몰락의 배경은 정치적 그리고 환경적 원인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리비아의 정치 상황을 들여다보면 국민의 불만을 이해할 수 있다. 리비아의 지도자 카다피는 1969년 27세 대위의 계급으로 쿠데타에 성공하고 42년 동안 권좌에 있었다. 아랍권 내에서도 최장기 집권 정부였다. 1977년 자마히리야 체제, 즉 독특한 형태의 인민직접민주주의를 선포한 카다피는 의회제도와 헌법을 폐기하고 전제 권력을 행사해 왔다. 의회에 해당하는 최고 의결기관인 총인민회의와 그 하위의 지방의회격인 기초인민회의를 두고, 또 그 아래에 주민 전원이 참여하는 자치공동체인 마할라트를 두어 사실상 모든 국민이 정치에 참여한다는 체제다. 여기에 카다피는 어떠한 직책도 갖지 않고 '대령' 계급만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어느 국정 사안에도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떠한 직책도 없지만 카다피는 실제로 전제권력을 행사했다. 어떠한 시위도 금지하고 정당도 허용치 않았다. 친위부대 성격의 군병력 12만을 철저히 장악하고 피의 통치를 감행해 왔다. 여기에 자신만을 비호하는 외국인 용병부대도 두었다. 여기에 막대한 오일머니를 이용해 우호적 부족에게는 혜택을 제공하고 충성을 약속받아왔다. 위협이 되는 부족은 매수하거나 완전히 소외시켰다.


여기에 카다피 일가의 정치 및 경제 권력 장악이 국민의 불만을 부추겼다. 부인 2명에 7남 1녀 모두 리비아의 각종 이권을 차지해 왔다. 예를 들어 첫 부인의 아들 장남 무함마드는 리비아올림픽위원회를 담당하면서 코카콜라 합작회사 리비아음료회사 지분 40%를 쥐고 있었다. 두 번째 부인에서 태어났지만 제2인자로 언급되는 차남 사이프 알-이슬람은 석유회사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이탈리아 기업과의 각종 이권사업에 개입하면서 막대한 부를 챙겼다. 파티와 주색잡기에 빠진 인물로도 유명했다. 반군 지도부는 이에 대해 "카다피 일가의 자산이 800억 달러에서 1,5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장기독재와 부패에 대해 전통적으로 반정부 성향이 강한 동부지역에서 2월 15일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카다피 정권으로부터 지속적인 탄압을 받아와 억눌린 분노가 한꺼번에 분출된 것이었다. 하지만 카다피는 보안군과 혁명위원회 소속 민병대를 동원해 시위대를 강제해산했고, 이 과정에서 4명이 사망했다. 이로 인해 추가적인 시위가 발생하자 카다피 정부는 아프리카 출신 외국인 용병을 동원해 무차별 진압을 감행했다. 자존심이 강한 동부 부족들은 국내 시위에 외국인 용병을 투입한 카다피 정권에 대해 이후 본격적인 반군활동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주변 아랍국가의 민주화 투쟁과 혁명 성공 사례가 반군의 투쟁에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그리고 환경적 원인에 국제사회(NATO)의 개입이 리비아 사태에서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월 말 리비아 정부가 공군력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하자 아랍연맹이 비행금지구역 설정을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상정했고, 이에 대해 유엔 안보리는 3월 17일 대리비아 결의안을 채택하고 본격적인 군사적 개입에 나섰다. 여기에 국제형사재판소(ICC)가 6월 27일 카다피와 그 일가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한 것이 반군의 군사적 투쟁에 정신적 도움을 주었다. 이후 나토군 주도의 공습을 등에 업은 반군은 점진적으로 트리폴리를 향해 나아갔고, 결국 7월 21일 인어작전을 통해 트리폴리를 장악하고, 8월 23일 카다피의 통치사무실이 위치한 바브 알-아지지야 요새를 함락시켰다. 따라서 실질적인 카다피 정권의 붕괴는 반군과 국제사회(NATO)의 '합작품'으로 볼 수 있다.

Ⅲ. 리비아의 새로운 지도부는?

반군의 대표기구인 과도 국가위원회(NTC)가 주축이 되어 '포스트 카다피' 시대를 이끌 것이 확실하다. 2월 26일 시위대에 대한 실탄 사격에 항의해 카다피 정부에서 사임한 법무장관 압둘 잘릴 무스타파가 설립한 NTC는 3월 5일 리비아의 유일한 대표임을 선언했었다. 위원장을 받고 있는 무스타파가 향후 포스트 카다피 시대를 이끌 영(0)순위 인물로 꼽히고 있다. 그의 지휘 하에 현재 NTC는 카다피 체제 붕괴 이후 권력 이양 작업과 치안, 보건, 교육 등 인프라 구축을 위한 청사진 마련을 위해 이미 '리비아 안정화 팀'을 구성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무스타파 위원장은 온건하며 강직한 법조인으로서 리비아 국내는 물론 국제사회에서도 가장 적절한 차기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다.

NTC에서 국방장관직을 맡고 있는 우마르 알-하리리도 반군의 선전과 더불어 급부상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1969년 카다피 주도의 쿠데타에 참여했지만 1975년 동료 장교들과 함께 카다피 정권 전복을 모의하다 발각돼 사형을 선고받고 투옥됐다. 알-하리리는 이후 15년간 옥살이를 하다 1990년 감형돼 출소한 뒤 토브루크에서 연금생활을 해 오다 NTC에 합류했다. 반군의 군사작전을 주도하면서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고 다국적군과 협력하는 데에 적극적이어서 향후 국방장관에 오를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NTC의 총리 역할은 물론 대외협력을 담당하고 있는 마흐무드 지브릴도 향후 리비아 정부에서 핵심인사가 될 전망이다. 미국의 피츠버그 대학에서 정치학과 전략학으로 석사와 박사를 취득한 해외파 학자다. 카다피 정부 내에서 국가기획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고, 2009년에는 국가경제발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카다피 정부 내에서 대미창구 역할을 했던 지브릴은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로 서방과의 협력을 책임질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인물은 재정과 석유 분야를 담당하고 있는 알리 타르후니다. 1974년 정치적 이유로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미시간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를 받은 뒤 워싱턴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경제학자 겸 반 카다피 운동을 해외에서 주도한 인물로 카다피 정권은 1981년 그를 궐석 재판에서 국적을 박탈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향후 리비아의 재건사업과 석유이권 배분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인사로서 서방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리비아의 미래를 짊어질 NTC는 33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양한 부족과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절반 정도는 안전상의 이유로 자신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NTC의 가장 큰 특징은 카다피 정부와는 달리 다양한 계층과 부족을 대표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부분이 향후 권력다툼에 빌미가 될 수도 있지만, 다원화 한 향후 리비아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NTC의 또 다른 특징은 '개혁적'인 성향이라고 언급할 수 있다. 독재에 저항한 위원회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위원장을 포함해 대부분이 구 카다피 체제에서 벗어나 민주적인 정부를 구성하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더불어 지브릴 총리와 타르후니 재정 및 석유 장관의 경우 상당한 친미 인사로 알려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 두 인사의 위원회 진입에 미국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결국 현재의 NTC, 그리고 향후 리비아 새 정부의 핵심 인물들은 친서방적 '개혁적' 인사들로 분류될 수 있다.

Ⅳ. 리비아 사태는'진행 중'

그러나 리비아 사태는 아직 '진행 중'이다. 카다피 정권이 붕괴했지만 정치 안정에는 걸림돌이 많다. 실제로 리비아는 이미 혁명에 성공한 이집트 및 튀니지와는 크게 다르다. 이집트 및 튀니지의 정권교체는 시민혁명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독재에 맞서 국민이 들고 일어나 결집력도 강했다. 정권 외에는 저항세력도 없었다. 때문에 보름 전후라는 짧은 기간 내에 대통령을 축출할 수 있었다. '권력이양'도 순조로웠다. 과거와 완전한 단절은 아니지만 군부가 잠정적이지만 합법적인 통치권을 이어받았다. 나름대로 치안을 유지하며 순조롭지는 않지만 새로운 정부구성을 준비 중에 있다.

그러나 리비아의 경우는 반군세력의 승리다. 국제사회(NATO)의 물심양면 지원을 받은 동부 벵가지 중심 반정부 무장세력에 의한 통치세력 축출이었다. 패배하고 기득권을 잃은 서부 트리폴리 중심의 분노한 집단이 존재한다. 평화적인 시위가 아니라 무력이 동원된 투쟁의 성공이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물적인 피해도 크다. 더불어 외부 서방세력의 군사적 지원이 뒷받침되었다는 사실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끝까지 새로운 통치 집단을 수용하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

새로 들어설 정부에 대한 우려도 크다. 반군 과도국가위원회(NTC)는 이미 '포스트 카다피' 시대의 청사진을 마련했다. 18개월 내에 유엔 감시 하에 선거를 실시하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이 매끄럽게 진행될지는 미지수다. 42년간의 카다피 장기 독재 체제가 무너지면서 발생한 권력 공백이 너무 크다. 민주주의 시스템에 너무 오랫 동안 멀어져 있었다. 튀니지와 이집트처럼 집권세력의 기반이었던 군부가 권력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을 받는 등 국제사회로부터 지지를 확보했지만 리비아 내부의 통합을 일궈낼지는 확신할 수 없다. NTC는 이미 부족과 정파 간의 이해관계로 분열하는 조짐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카다피 체제에서 이탈한 장관은 물론 반정부 인사, 해외 망명자, 아랍민족주의자, 이슬람주의자 등 다양한 배경의 인사들이 포함돼 있다. 게다가 최근 트리폴리의 서쪽과 남쪽 보급로를 차단하는 등 잇따라 승전보를 전한 서부 반군의 지분도 있다. 서부 반군은 지지부진한 동부 반군에 대해 불신하고 있다. 통합이 어려울 경우 압둘 잘릴 NTC 의장이 사퇴하겠다고 계속 위협하는 것도 내부의 분열이 이미 표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NTC에서도 최대의 분열 요인이자 리비아 미래의 가장 큰 모래 늪은 역시 부족주의다. 리비아 반군의 실세는 반카다피 부족세력이다. 반면 카다피를 끝까지 옹호하면서 투쟁하는 세력은 친카다피 부족세력이다. 서로 연결고리가 약한 140여 개 부족이 정치적, 경제적 필요에 의해 연대를 구축하고 생존과 기득권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이 리비아 사태의 기본적인 틀이다.

부족의 전통에는 '승자 독식'의 원칙이 있다. 최대부족 내 가장 강력한 가문이 사실상 모든 것을 차지한다. 현재 걸프 산유국에서도 정치 및 경제 이권은 거의 모두 지배 가문이 차지하고 있다. 이집트와 튀니지와는 달리 리비아, 예멘, 시리아 등의 반정부 투쟁이 피를 뿌리고 장기화하는 배경도 '패배하면 모든 것을 잃는다'라는 인식을 가진 지배 부족이 '벼랑 끝 전술'을 동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족주의의 또 다른 특징은 보복이다. 유럽연합(EU)의 반군에 보복행위를 하지 말 것을 강력 경고한 것도 이를 의식해서다. 보복의 악순환이 리비아의 안정에 최대 위협요소가 될 수 있다. 더불어 카다피가 사망하거나 망명하더라도 그와 그의 가족과 측근들이 부족 간 대립을 활용해 전후 복구 과정에 개입하거나 이를 방해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산유국 리비아마저 붕괴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장기적인 계획도 마련해야 한다.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에 이어 이번 아랍권 시민 혁명은 빠른 속도는 아니겠지만 분명히 중장기적으로 왕정 산유국들로 확산할 것이다. 석유 수입, 상품 및 플랜트 수주 등에 집중해 온 우리의 진출 방안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 로비와 인맥에 의존한 수주방식에서 벗어나 진정한 경쟁력을 갖춘 플랜트 수주 방안도 수립해야 한다. 수출과 진출의 다변화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보다 동반자적 협력의 틀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2011/09/09)

덧붙이는 글 | * 코리아연구원 현안진단 198호입니다. 코리아연구원 홈페이지(www.knsi.org)에서 원문 및 풍부한 참고자료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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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가다피 #NTC #NATO #코리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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