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함께 걸은 '이소선 어머니의 길'

[인권위 공무원의 정직한 일기 ③]

등록 2011.09.11 12:18수정 2011.09.11 12:18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빠, 태일이 엄마가 보고 싶어…."


휴일 저녁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이 말했다. 박태옥이 쓰고 최호철이 그린 만화 <태일이>를 두 번 읽은 아들이었다. 아들은 다섯 권을 읽는 동안 참 많은 질문을 했었다.

"왜 불에 타서 죽어야만 했지? 근로기준법은 지금 잘 지켜지고 있어? 태일이 가족들은 태일이가 죽은 뒤에 어떻게 살았어?"

아들의 물음은 간결했으나 아빠의 대답은 지루했다. 마흔세 살 아빠는 열두 살 아들에게 전태일의 삶을 쌈빡하게 정리해주지 못했다. 다만 나중에 태일이가 일하던 평화시장과 태일이가 묻혀 있는 마석 모란공원에 가보자고 약속했을 뿐이다.

이소선 여사가 소천했다.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생을 노동자의 어머니로 살아온 그가 떠난 것이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으로 가는 희망버스에 오르려 했다는 소식에 가슴이 저려온다.

아들과 함께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았다. 영전 앞에서 묵념을 마친 아들이 아빠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묻는다.


 "순옥이와 순덕이는 어디 있어?"

바쁜 걸음으로 문상객을 맞는 그들이 보인다. 전태일의 '대학생 친구' 장기표 선생도 보인다. 전태일의 분신으로 삶의 좌표가 바뀐 노동운동가들과 정치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청계천 전태일 다리에서 건너편 통일상가를 보았다. 아들에게 전태일이 마지막으로 걸었던 길이라고 일러주었다. 아들은 눈을 반짝이며 만화 속 장면을 더듬었다. 촛불을 나누는 시민들 곁에서 아들은 태일이가 착한 사람일 거라고 말했다. 아마도 버스비로 풀빵을 사서 시다들에게 나눠주고 집까지 걸어가던 장면을 떠올린 모양이다.

촛불은 동대문을 지나 이소선 여사가 살던 전세방으로 이동했다. 시민들은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부르며 고인을 애도했다. 첫 소절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 어머님의 눈물이' 대목에서 울컥했다. 꼬박 11년 전 기자 신분으로 '전태일 분신 30주년, 인생을 바꾼 사람들'을 취재할 때가 떠올랐다. 그때 이소선 여사는 "30년이 지났는데도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라며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었다.

영정은 전태일 재단 사무실을 거쳐 '한울삶'으로 향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사무실이 있는 곳이다. 영정이 길거리로 쫓겨날까 걱정돼 이소선 어머니가 백방으로 뛰며 마련한 거처다. 영정이 문 앞으로 다가서자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가 오열했다.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씨의 눈도 붉어졌다. 아들이 "저 할머니는 왜 울어?"라고 묻는다. 아빠의 이야기는 1970년에서 1987년으로 옮겨간다. 아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상처의 역사다.

한울삶 안에서 수많은 영정을 보았다. 인권활동가 박래군씨의 말이 이어진다.

"유가협 어머니들은 영정을 보면서 대화를 나눕니다."

어머니들은 살아남은 이들의 결혼식이 가장 슬픈 자리였다고 고백한다. "차라리 감옥에 갇힌 장기수라도 살아만 있었으면…"이란 한 맺힌 통곡을 나누며 소주잔을 기울여온 그들이다.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 길, 아들이 손가락을 세다 말고 묻는다.

"아빠, 태일이가 태어날 때 몇 살이었어?"
"두 살."
"근데 어떻게 태일이가 죽은 걸 알았어? 아빠도 만화책 읽었어?"
"아니 그때는 그런 만화책이 없었어…."

대학교 1학년 때 읽은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은 이른바 '불온서적'이었다. 전태일의 편지와 일기를 엮은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도 마찬가지다. 아빠는 불온서적을 통해 세상의 빛을 보았다. 만화 <태일이>가 '불온서적'이 아닌 건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첨부파일
정직일기-3회.hwp
추모문화제-아들.JPG
덧붙이는 글 인권에 관한 이야기와 일상의 소탈한 이야기를 번갈아 올릴까 합니다.
정직한 일기 연재기사들이 한 묶음으로 보일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한가위에 고생하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소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인권>의 주요기사를 오마이뉴스에 게재하고, 우리 사회 주요 인권현안에 대한 인권위의 의견 등을 네티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꾸벅...


AD

AD

AD

인기기사

  1. 1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2. 2 의사 아빠가 죽은 딸의 심장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 의사 아빠가 죽은 딸의 심장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
  3. 3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4. 4 남편 술주정도 견뎠는데, 집 물려줄 거라 믿었던 시댁의 배신 남편 술주정도 견뎠는데, 집 물려줄 거라 믿었던 시댁의 배신
  5. 5 [단독] 조은희 "명태균 만났고 안다, 영남 황태자? 하고 싶었겠지" [단독] 조은희 "명태균 만났고 안다, 영남 황태자? 하고 싶었겠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