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悲歌, 디르사에게>의 표지와 이정환 시인의 근래 모습
정만진
에워쌌으니 아아 그대 나를 에워쌌으니 향기로워라 온 세상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온 누리 향기로워라 나 그대 에워쌌으니향기롭다. 그대가 나를 에워쌌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나 또한 그대를 에워쌌다. 그러니 온 누리가 다 향기롭다. 아아, 그대가 나를 에워싸고 나 역시 그대를 에워쌌으니, 온 세상은 향기로 가득하도다.
절창 <에워쌌으니>의 시인 이정환의 새 시집 <비가, 디르사에게>가 세상에 나왔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정환 시인의 9번째 시집이다. 등단 이후 30년 동안 <아침 반감>, <서서 천년을 흐를지라도>, <불의 흔적>, <물소리를 꺾어 그대에게 바치다>, <금빛 잉어>, <가구가 운다, 나무가 운다>, <원에 관하여>, <분홍 물갈퀴>이라는 제목으로 8권의 시집을 상재했으니 다작도 과작도 아닌 이정환 시인, 그 동안 꾸준하고 수준높은 창작활동을 보여주었고, 그에 따른 평가로 대구문학상, 중앙시조대상, 이호우시조문학상 등을 받았다.
수상 경력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이정환의 시는 '시조'이다. 흔히 '3장'으로 기억하는 우리의 전통시 '시조' 말이다. 그러나 이정환의 시는 단심가나 회고가 같은 구태의연한 내용과 형식을 보여주는 그런 고시조류는 결코 아니다. 이 글 첫머리에 제시한 <에워쌌으니>가 잘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그는 우리말을 세련되게 활용한 현대적 어조로 단아하고 절제된 형식과 내용을 보여준다.
햇살이 눈부시다는 것 비로소 알았습니다꽃이 피었다는 것 이제야 알았습니다세상이 조금씩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비가, 디르사에게 2
<에워쌌으니>의 '그대'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비가, 디르사에게 2>의 '디르사'가 누구인지도 역시 헤아릴 길이 없다. '디르사'가 시조 본문 속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이번 시집이 모두 '디르사 연작'으로 채워졌으므로 햇살이 눈부시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꽃이 피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세상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것도 모두 디르사를 만난 덕분이겠는데, 디르사의 정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뛰어넘을 수 없는 잿빛 경계 앞에 아득한 날어쩌지 못할 저물녘 물결 앞에 아득한 날한순간 안으로 쳐들어온 적설 앞에 아득한 날- 비가, 디르사에게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