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규동<나비와 광장>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원로시인 김규동(87) 선생이 28일(수) 낮 2시 30쯤 이 세상을 떠났다.
시인학교
이북에
누님 두 분 계십니다 큰누님은 이름이 김용금(金龍金)이고 작은누이는 김선옥(金鮮玉)이라 합니다누구시든지 혹 소식 아시는 분은 안 계시는지요이 넓은 천지지간에 손톱만큼이라도소식 아시는 분 안 계실런지요안 계실런지요- <누님> 모두<나비와 광장>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원로시인 김규동(87) 선생이 28일(수) 낮 2시 30쯤 폐렴과 노환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선생을 잘 따르던 시인 박재웅 말에 따르면 "선생님은 몇 해 전부터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후배들 시를 읽고 평가를 하는 데는 주저하지 않았다"라며 "28일 낮에 아드님에게 몸을 깨끗하게 씻겨달라고 한 뒤 마치 하늘과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 세상을 스스로 떠나가셨다"고 말했다.
시인 김규동(金奎東)은 호가 문곡(文谷)이며 1925년 2월 13일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났다. 1948년 <예술조선> 신춘문예에 시 <강>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46년 연변의대를 마쳤으며, 경성고보에 다닐 때 스승인 김기림(金起林) 시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51년에는 시인 박인환, 김경린 등과 함께 <후반기>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1955년에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우리는 살리라>,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포대가 있는 풍경>이 당선되기도 했다. 1960년 자유문협상을 받았으며,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을 맡았다.
문학평론가들 평가에 따르면 김규동 선생 시작활동은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나 비와 광장>(1955), <현대의 신화>(1958) 등을 펴냈던 1960년 들머리까지다. 선생은 이때 <포대가 있는 풍경>, <어느 병상의 연대> 등에서 전쟁, 도시문명 비판의식, 현실 비판 등 모더니즘와 비슷한 시를 많이 발표했다.
둘째는 1960년대 뒤부터다. 이때부터 선생 시는 많은 변화를 겪는다. 특히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고문을 맡으면서 많이 달라진다. 통일문제, 노사문제, 학생시위 등 현실 문제를 시에 담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펴낸 시집으로 <죽음 속의 영웅>(1977), <깨끗한 희망>(1985), <오늘 밤 기러기떼는>(1989) 등이 있으며, 평론집으로는 <새로운 시론>(1959), <지성과 고독의 문학>(1962), <어두운 시대의 마지막 언어>(1979) 등이 있다. 그 뒤 시집 <생명의 노래>(1991), <길은 멀어도>(1991), <흰각시분꽃>(1993), <느릅나무에게>(2005) 등이 있다.
그나저나 고향 집 우물가 느릅나무는 안녕한지 모르겠습니다. 죽기 전에 그 느릅나무를 만나봤으면! 느릅나무는 60년 동안의 역사를 다 말해주련만…. 나는 아름드리 그 나무에 기대어 그가 하는 그리운 이야기를 말없이 듣고 섰으련만…. 혼돈과 무질서, 허위와 광기의 시대를 용케도 시라는 무기가 있어 그나마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시는 존재 이유였고 삶의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자전에세이 <나는 시인이다>(2011년 3월 펴낸 마지막 책) '시인의 말' 몇 토막 덧붙이는 글 | 장례식장은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9호(서울 강남구 일원동)이며, 발인은 10월 1일 아침 8시, 장지는 모란공원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강춘영 여사와 큰아들 윤, 둘째아들 현, 셋째아들 준이 있다. 연락처는 1599-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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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통일' 글수레로 이끈 '큰별' 김규동 시인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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