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태섭 변호사가 쓴 <확신의 함정>
이윤기
소설가가 꿈인 변호사. 금태섭 변호사를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그가 현직 검사로 재직하면서 <한겨레>에 '현직 검사가 말하는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이라는 칼럼 때문이고, 또 하나는 그가 쓴 <디케의 눈>이라는 책을 아주 흥미롭게 읽은 탓입니다.
그는 <한겨레> 연재를 끝내지 못하고 검사를 그만 두었으며 그 후 법무법인 소속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가 새로 쓴 책 <확신의 함정>은 사람들이 조금도 틀림없다고 믿는 것들이 정말 어이없게도 틀릴 수 있다는 것, 믿었던 것과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독자들에게 '확신의 함정'을 보여주는데 소설을 인용한다는 것입니다. 널리 알려진 소설을 인용함으로써 쉽게 독자들의 공감을 끌어내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소설의 경우에도 그 줄거리를 잘 요약하여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작인 <디케의 눈>에서도 드러났지만 그는 많은 책을 읽는 독서가입니다. <확신의 함정>에는 모두 50여 편의 소설을 인용하여 누구나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책을 읽는 내내 현직 검사도 로펌소속 변호사도 분명 한가한 직업이 아닌데 언제 이렇게 많은 소설을 읽었을까하는 궁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만, 법률가인 저자의 꿈이 소설가라는 걸 알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습니다.
소설가가 꿈인 검사 출신 변호사이 책은 저자가 초임검사 시절 경험한 사건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어느 젊은 남자가 길에 주차되어 있던 그랜저(당시엔 최고급 차종이었겠지요)를 훔친 혐의로 잡혀왔습니다.
주인은 문을 잠그고 용산에 세워두었다고 하고, 범인은 문이 열린 차를 서울역 앞에서 훔쳤다고 주장하였다는 것입니다. 피의자가 범행을 부인하지 않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답니다.
게다가 오히려 피의자에게 딱한 사정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10대 후반에 교도소에 들어가서 5년 형을 선고 받고 7년의 보호감호 처분을 받아 12년을 복역하고 출소해 몇 달 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보호감호제도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던 차에 불쌍해 보이는 피의자는 검사 앞에서 말도 못 하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변호인 찾아와서 보호감호청구만 빼달라고 하소연을 하여 그리하였다는 것입니다.
보통의 경우 초범이 아니니 3년은 구형해야 하고 보호감호 청구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처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피의자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여 보호감호 처분을 하지 않았더니, 판사도 마찬가지로 딱하게 여겼는지 집행유예를 선고하였답니다.
그런데 몇 달 후에 이 피의자가 납치강도 용의자로 신문에 보도되었다고 합니다. 그제야 부랴부랴 확인해봤더니 집행유예로 풀려난 후 곧장 납치강도 행각을 벌였고, 차량을 훔친 것도 납치 강도짓을 벌이기 위한 준비였더라는 겁니다.
폭행, 절도로 되어 있는 전과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니 차를 훔쳐 데이트하는 남녀를 유인해 폭행하고 금품을 빼앗았더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시간이 흐른 뒤에 이 사건을 다시 생각해보면서 판단을 그르친 원인을 찾아보았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겪고 나서, 나는 판단을 그르치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은 선입견, 오만, 그리고 불성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7년간 보호감호를 받게 하는 것은 나쁜 것이라는 선입견, 척 보면 사건의 전말을 안다는 오만, 그리고 당연히 확인해야 할 내용을 확인하지 않은 게으름이 판단착오를 불러 온 것이다."저자는 사실관계를 잘못 판단하여 이런 실수를 저질렀지만, 사실 관계뿐 아니라 무엇이 옳은 것인지 판단할 때도 이런 실수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떤 문제에 답을 찾으려 할 때는 성급하게 결론에 이르지 말아야 하며, 가치를 다투는 복잡한 사회현안에는 더욱 신중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확신한다구요? 만약 당신이 틀렸다면?때로는 답이 하나가 아닌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저자는 '확신의 함정'을 염두에 두고 사형제존폐론, 성매매 논쟁, 체벌, 종교와 문화의 충돌, 생명과학에 대한 법과 윤리의 기준 등에 관하여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고 살펴봅니다.
그러면서 그냥 자신의 경험과 주장을 나열하면서 독자들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소설, 혹은 어떤 쟁점 사안들에 대한 사람들의 선입견을 명징하게 비춰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소설들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이 책은 제가 속해 있는 단체에서 이달의 도서로 정해 회원들이 함께 읽고 있습니다. 그중에 소설 읽기를 좋아하는 어떤 분은 금태섭 변호사가 <확신의 함정>에서 인용한 소설들을 차례로 읽어봐야겠다는 목표를 세우더군요.
저자는 먼저 사형제도와 체벌에 관하여 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 다른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는 스티븐 킹의 <그린 마일>,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대신에 잔인한 폭탄테러범이 주인공인 소설 존 그리샴의 <가스실>을 등장시킵니다.
KKK 단원이었던 주인공 샘은 사람을 죽인 폭탄테러의 범인이 아니었지만, 공범이 저지른 사건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진범을 알고 있었지만, '동료를 밀고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과 밀고 할 경우 자신의 가족을 죽이겠다는 협박 때문에 입을 다물게 됩니다.
사건 발생 후 14년이 지난 재판에서 그는 사형을 선고 받고 가스실에 들어갈 날짜만 기다립니다. 사형수가 된 후 9년을 버티면서 상소를 하고, 감형을 주장하던 중에 젊은 변호사 한 사람이 그를 찾아옵니다. 바로 자신의 손자입니다.
샘의 나이는 일흔이었고 사형 집행은 4주가 남아있었습니다. 손자인 젊은 변호사 애덤은 할아버지에게 공범의 존재를 털어놓으라고 권유하지만 끝내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이번에도 공범으로부터 손자 애덤을 비롯한 가족들을 지키기 위한 선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