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는 살아있다>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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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언론인 정운현씨의 <친일파는 살아있다>라는 신간을 펼치면서 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지난 날에는 영화가 개봉되면 먼저 서울 유명극장에서 상영되다가 관객이 시들할 무렵에야 지방 중소도시에서 상영되었다.
하지만 요즘은 서울 지방 중소도시가 거의 동시개봉으로 영화 문화만큼은 시공을 초월케 되었다.
그동안 우리 사회를 발끈 달구었던 영화 <도가니>를 지난달 하순 개봉 다음 날인 원주의 한 극장에서 보면서 경악과 함께, 내가 사람이라는 게, 내가 평생 교육계에 몸담았던 사실이 못내 부끄러웠다.
곧 영화 <도가니>에 대한 분노는 볕 좋은 봄날 산불처럼 번져 실제 도가니 사건이 일어난 인화학교의 폐교가 추진되는가 하면, 도가니 방지법이 국회에 제출되고, 광주경찰서는 도가니 사건을 재수사한다는 보도가 연일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도배하다시피 덮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우리 사회에서 한 작가의 소설이, 한 영화감독의 작품이 큰일을 해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을 보면서도 여전히 내 마음이 무겁고 우울한 것은 이 '도가니' 열풍도 시간이 흐르면 곧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식으로 사라질 것이라는 점과 학교 사회의 비리가 비단 그 학교만이 아닐 거라는 점,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건은 자기와는 전혀 관계없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지겹게 들어온 '친일파' 문제
'친일파는 살아있다'. 언제 적부터 들어온 말인가. 해방 후 67년째다. 지겹게 들어온 말이고, 지겹게 들어왔어도 늘 그때뿐으로 유야무야 넘어간, 단골 화두였다. 몇 해 전 친일문제를 연구해온 한 인사(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에게 "왜 아직도 친일파 척결문제냐?"고 시침을 떼고 물어보았다.
나는 오히려 그들(비판세력들)에게 "왜 해방 60돌이 되도록 친일파를 옹호하려고 하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친일파 문제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현재의 문제입니다. 민주화의 바탕이 될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언론, 문화 등 우리 국가와 민족의 모든 개혁이 친일파 청산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화통일 문제까지도 친일파 청산 위에서만 가능합니다.다시 그들에게 "친일파 청산을 하지 않고도 이 모든 문제를 다 개혁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싶습니다. …… 친일파 청산은 결코 과거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 현재의 문제입니다.결국 우리 사회의 도덕이 무너지고 정의감이 사라진 것은, 또 교육계와 검찰, 언론이 제 구실을 못한 것은, 해방 후 첫 단추인 친일파 문제를 제대로 해결치 않은 데서 그 근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1999년 항일유적답사 길에 베이징에서 한 독립 운동가를 만났다.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는 기타 범죄는 범죄가 아닌 세상이다. 나라 팔아먹은 놈도, 왜놈 앞잡이 하던 놈도, 대를 물려가며 높은 벼슬하며 떵떵거리고 사는 세상에 배고파서 도둑질한 사람이 무슨 죄가 되겠느냐? 그런 나라는 부패하기 마련이고 도의와 양심은 땅에 떨어져 버린다. 그때 그분(이명준 선생)은 93세의 고령임에도 서릿발 같은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내 무딘 양심을 두들겼다. 평생 해외에 사시면서도 우리 사회의 부도덕을 단 한 마디로 진단하는 말씀이었다.
대책 없는 사람정운현, 나는 그를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라는 책을 통해서 알았다. 그 책 속에서 나는 내가 다녔던 학교, 내가 몸담았던 학교의 전 교주도 친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내가 즐겨 읽던 시의 지은이도, 기미독립선언서를 쓴 분도,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도 친일에 발 담갔다는 사실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 글을 줄곧 써온 정운현을 2000년 여름, 내가 한 독립투사에 감명 받아 북만주를 헤매고 돌아온 뒤 한 대학연구실에 만났다. 그날 이후 그와 나는 기자와 작가로, 편집국장과 시민기자로, 심지어 학부모와 교사로, 요즘에는 같은 저술인(사실은 피차 백수로)으로 인연의 끈을 이어왔다.
그가 가정으로나 사회로도 한창 일해야 하는 49세 나이로 황당하게 직장에서 쫓겨난 이후 이따금 서울 가는 길에 만났다. 그의 집 가까운 독립문 공원 나무의자에서 음료수를, 인사동 주점에서 소주잔을 나누며,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곤 하다가 입에 발린 내 위로의 말조차도 오히려 그의 아픔을 가중시킬 것 같아 올봄부터는 연락도 삼가한 채 적조하게 지냈다. 그런 가운데 어제 그의 인생에 족쇄가 된 친일파 문제를 또 다룬 신간 <친일파는 살아있다>는 책을 보내왔다.
연전에 그를 만났을 때 "이제는 전문 저술가로 밥벌이를 해야겠다"는 말을 들고서는 나는 반가운 마음에 다산도 유배시절에 수백 권의 책을 저술했다는 얘기를 들려주며 애틋하고 뜨거운 사랑 얘기나 이런저런 흥미진진한 세상 뒷골목 이야기책을 펴내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를 충심으로 기원했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정체성을 속일 수 없었던 듯, 또 기득권층에 가시가 되고, 일반 독자들이 별로 눈길을 주지 않을 책을 펴낸데 대해 다소 역정도 났다. 하지만, 우선 나부터 인터넷서점에서 책을 사 친지에게 보낸 뒤 지난 연분을 생각하여 그의 책 홍보에 소매를 걷었다. 정말 정운현, 그는 대책 없는 가장이다. 하지만 그는 지난 날 바른 역사를 쓰다가 궁형을 당한 현대판 '사마천'이요, 우리 사회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과 같은 의인이다.
우리 사회가 그래도 이나마 유지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안일보다 나라와 겨레의 양심이나 정의감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의인들이 우리 사회에 보이지 않는 곳에 더러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성서에서 말한 "의인 열 사람이 없어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했다"는 이야기 속의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 역할을 정운현 그가 지금 하고 있다.
친일파 문제, 어떻게 풀어야 할까?이제 나의 글 마무리로 '친일파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를 말하고자 한다. 나는 오늘 아침 이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는데, 문득 2009년 10월 안중근 유적답사 길에 하얼빈에 갔을 때 일이 떠올랐다. 그때 하얼빈 동포 사학자 김우종 선생은 이제는 동북열사기념관이 된 옛 하얼빈경찰서 지하에 재현 놓은 일제강점기 당시의 고문 및 신문 장면을 안내해 주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은 일제 폐망 후 전범(戰犯)과 한간(漢奸, 일제 협력자)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재판에 회부하여 처리했습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고, 그들이 개전의 정으로 참회 눈물을 흘린 자는 모두 감형 등으로 용서하거나 석방했습니다. 가장 오랜 수형자가 25년 감옥에서 징역을 살았습니다. 심지어 황제 푸의까지도 처벌했습니다.우리나라도 벌써 그렇게 처리했어야 했다. 해방 후 즉시 우리나라도 반민특위를 제대로 운영하여 민족반역의 무리를 처벌했다면 오늘까지 친일문제가 우리 사회의 갈등요인으로 남아 있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