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비-2포스코 역사관에서 조사한 철비
포스코역사관
철비에 관한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중국 진나라 학자인 진수(陳壽, 233~397)에 의해 편찬된 <정사삼국지>에 유비의 묘 앞에 철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처음이며, 우리나라의 문헌에서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이 지은 <동악집(東岳集)>(1640)에서 회양(현 강원도 고성 부근)의 길가에 높이 삼 척(현재 길이로 약 90cm)의 철비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현존하는 철비 중 가장 오래된 철비로는 1631년 현감 이원명정거사비(충북 진천군), 영장유공춘호영세불망비(경북 경주시)를 꼽고 있다.
철비는 18세기에 들어 제작이 급격하게 증가하는데 이를 철 생산력의 증대와 함께 국가에서 철의 사용을 엄격히 통제하던 제도가 붕괴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그럼 조선시대 사람들은 왜 철비를 만들어 세웠을까? 여러 가지 목적이 있었겠지만 나무나 돌에 비해 강하고 영원하다는 믿음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중요한 공덕비의 건립이나. 맹세의 상징으로 건립했다. 철은 동양사상에서는 악한 것을 물리치고 지기가 강한 곳을 누른다는 비보풍수의 목적으로 이용돼왔다(일제강점기 때 국토 곳곳에 박은 쇠말뚝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겠다).
철비가 세워진 가문은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는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철비는 선정을 베푼 관리를 잊지 않기 위해 마을 주민이 세운다고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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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에 대한 민중의 최고 찬사, 철비(鐵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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