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 국립오페라단의 <가면무도회>는 이탈리아의 작곡가 베르디 최후의 역작으로 실제 이탈리아의 왕 구스타프 3세 암살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국왕암살이라는 실화가 배경이므로 초연 당시 많은 제제가 따랐었지만, 이탈리아의 온 국민은 이 오페라의 공연이 성사되기를 염원하였다고 한다.
여주인공에 대한 이야기가 주요 스토리인 여느 오페라와는 달리 <가면무도회>는 남자가수가 주인공이다. 전체 3막인 이 오페라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1막에서 신하들로부터 암살의 음모에 둘러싸여 있는 국왕 리카르도는 충신이자 친구인 레나토의 아내 아멜리아를 사랑한다. 2막에서 아멜리아와 리카르도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던 중 레나토에게 발각되고 3막에서 결국은 암살자들과 레나토에게 가면무도회에서 왕 리카르도가 죽임을 당한다.
무대는 하나로 통일하면서도 막마다 세부적으로 바뀌어 다채로우면서도 웅장하고 심플함을 동시에 갖추었다. 천장에 1막부터 3막까지 계속적으로 위치하는 깨진 거울 샹들리에는 막마다 다른 이미지를 투영하여 장면별로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1막과 2막에서는 무대 가운데 거대한 계단이 칼날형태로 자리한다. 그 칼끝이 왕 리카르도가 앉아있는 의자인 것이 암살의 음모를 암시하듯 섬뜩하다. 궁정에 있는 사람들의 옷은 붉은색으로 강렬함과 동시에 피를 상징한다. 리카르도를 암살하려고 계획하는 신하들. 리카르도는 칼날 끝에서 아슬아슬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라는 느낌을 준다.
1막 1장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남몰래 아멜리아를 사랑하는 리카르도 왕이 무도회 명단에 아멜리아의 이름을 보고 부르는 < La rivedra nell estasi - 다시 황홀하게 그녀를 만나볼 수 있으리 >. 유럽무대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테너 정의근은 국제적인 명성답게 절절한 마음을 담아 아멜리아를 향한 사랑의 노래를 감미롭게 불렀다.
1막 2장은 울리카 역의 이아경의 존재가 단연 돋보였다. 그녀는 콘트랄토의 음역을 낼 수 있는 국내 유일의 메조 소프라노로 < Re dell abisso, affrettati -어둠의 왕이시여 서두르소서 >를 부르며 저음부터 고음까지 폭넓은 음역을 매끄럽고 윤기있게 표현하고 있었고, 이것이 미래를 예언하는 카리스마 있는 점쟁이 울리카의 역할에 아주 잘 어울렸다.
댄스씨어터 까두는 오페라 전체에서 극의 분위기를 강조하고 표면화하는 작업에 일조하였다. 1막 2장 울리카의 점집에서는 울리카를 신봉하는 무희들이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으며, 3막 2장 가면무도회장에서는 인생의 종말을 예고하는 차가운 가면의 꼭두각시들이 인생의 허무함을 희화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2막 무대는 검푸른 빛으로 리카르도와 아멜리아의 어두운 사랑과 암살자들로부터 리카르도의 쫓기는 처지를 잘 드러내주었다. 교수형장에 약초를 캐러온 아멜리아가 리카르도와 부르는 사랑의 이중창 < Teco Io Sto - 내가 여기 있소 >와 < Oh, Qual Soave Brivido - 오 달콤한 전율이 >의 무척 절절하고 감미로운 노래가 가슴을 적셔온다. 레나토가 나타나 자객의 존재를 왕에게 알린다. 리카르도는 아멜리아의 존재를 모르는 레나토에게 그녀의 베일을 벗기지 말라고 부탁하지만 반역자들로부터의 위협에 아멜리아 스스로 베일을 벗게 되고, 아내인 아멜리아와 왕 리카르도의 불륜을 알게 된 레나토는 몹시 충격을 받는다.
배역 분포에 대하여 정리하자면, 리카르도(정의근, 김중일), 레나토(고성현, 석상근), 아멜리아(임세경, 이정아), 오스카(정시영, 구은경), 울리카(이아경), 실바노(박준혁), 사무엘(성승민), 톰(김대엽), 법관, 하인(김건우) 모두 풍부한 성량과 충실한 연기로 극을 시원하게 이끌어갔다. 정의근의 리카르도와 고성현의 레나토는 역시 중후하고 품위있었다. 4일 공연동안 고성현, 정의근, 임세경, 정시영 주연의 날(13, 15일)과, 김중일, 석상근, 이정아, 구은경 주연의 날(14, 16일)이 감상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났다. 배역분포에 있어서 성량도 중후하고 풍부하며 연기 경험도 폭넓은 기성가수 그룹과 화려한 기량이 검증되었지만 아직은 앳된 신예성악가 그룹으로 구분되어서, 목요일 토요일 공연과 금요일 일요일 공연의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3막 1장의 무대는 레나토의 냉철한 분노를 반영하는 듯 깔끔한 수세식 변기나 거울이 인상적이다. 아내와 왕의 불륜에 치를 떠는 레나토의 뒷모습(고성현, 석상근 역)은 붉은색 의상에서 더욱 강렬한 복수의 기운이 느껴진다. 고성현이 부르는 < Eri tu che macchiavi quell'anima - 너였구나, 내 영혼을 더럽힌 자가 >는 일품이었다. 레나토가 아멜리아를 죽이려 하자, 아멜리아는 한번만 아들을 보게 해달라며 애원한다. 이에 가면무도회에서 누가 왕을 죽일 것인지 아멜리아에게 제비뽑기를 하게 하고 결국은 레나토가 당첨된다.
3막 2장의 은색빛의 가면 무도회장은 거울의 파편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샹드리에가 깨어진 신의를 상징한다. 가면은 표정을 숨기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음모를 숨기는 역할이라면, 거울은 있는 그대로를 비추는 것이지만 '깨진' 거울로 인간 사이의 믿음이 깨어진 상태를 나타낸다. 피에로 분장의 무용수들은 아이러니한 인생의 종말을 비추고 있었다. 2막부터 왕을 쫓아다니는 뼈다귀 악령은 죽음의 그림자로 자신의 손을 잡는 사람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것이라던 울리카의 예언을 비웃는 리카르도 왕의 뒤를 꾸준히 쫓아다닌다. 결국 리카르도는 친한 친구이자 신하인 레나토의 손에 힘없이 죽게된다.
전체적으로 이번 가면무도회는 무대나 배우들의 노래, 연기, 무용수의 배치 모두 무난하고 적절하였다. 기성 오페라 가수들의 날인 13일과 15일은 군데군데 브라보 화답 등등 풍성한 울림의 노래에 큰 충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신예 가수들인 14일과 16일에는 물론 정확하지만, 다소 평면적인 음색과 농도에서 2 퍼센트 부족하였다. 같은 배역에 이렇게 느낌이 다른 오페라를 보는 경험은 아마도 처음이다. 예를 들면 고성현의 대표알같은 소리의 울림을 석상근이 '아직은' 표현해 내기 힘들어보였다. 아멜리아 역시 첫날의 임세경이 둘째날의 이정아보다 고음의 처리에서도 훨씬 기름칠을 한 듯 훨씬 윤기있게 잘 올라갔다.
가면이라는 장치는 인간의 '숨기고자' 하는 욕망을 전면으로 드러내면서 감춰준다. 그 가면 무도회장에서 레나토는 왕 리카르도를 저격하지만, 왕은 죽어가면서도 숨을 헐떡이며 레나토에게 임명장을 보이며 아멜리아와 새로운 부임지로 떠나라고 당부하는 장면은 용서와 화해의 모습을 보여준다. 왕이 부르는 < Ma se m'e forza perderti - 하지만 그대를 영원히 잃는다 해도 >가 무척 감미로웠다. 이로써 오페라 가면무도회는 진정한 '화해'를 보여주는 오페라이다. 국립오페라단의 2011년 마지막 오페라로 택한 가면무도회는 좋은 결정이었던 듯 싶다.
2011.10.23 17:59 | ⓒ 2011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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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전공하고 작곡과 사운드아트 미디어 아트 분야에서 대학강의 및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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