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 240여일만에 복직합의를 이끌어낸 투쟁의 성과를 축하하고 평가하는 자리에 걸렸던 수백명의 이름이 빼곡했던 대형 현수막. 부당해고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지지한다던 학생들은 한명, 두명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고 했다. 나중에 저 현수막은 도저히 걸 수 없는 지경이 됐다.
대학노조 명지대지부
평범하지 않은, 그러나 평범해야만 하는
나는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는 아버지 덕분에 남부끄럽지 않은 경제적 여유를 누리며 살았다. 경기도에 있는 70평 이상의 아파트에 살고, 아버지 소유의 조그만 상가와 한 가족 먹고살기엔 부족함 없는 쌀과 열매들이 나오는 논밭을 가지고 있는 그런 유복한 삶이었다.
여느 부모가 그렇듯, 나는 언제나 부모님에게 한편으론 대견하고, 한편으론 미안하고, 한편으론 걱정되는 자식이었다. 그런 자식이 홀어머니의 외동딸을 임신시켰고, 그래서 결혼을 하겠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심지어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는 '가난'이라는 것이 무언지 일생으로 느끼며 살아온 이들이었다. 막장드라마의 단골 소재로 제격인 상황설정이었다. 부잣집 도련님이 꼬셔낸 신데렐라 같은 것 말이다.
다행히 막장 드라마는 없었다. 나의 부모님은 우리의 결혼을 축복하고 허락해주셨다. 결혼식까지 올리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올해 5월에 혼인신고를 했다.
나는 물론, 나의 부모님 모두 한국 사회의 기준에서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인 덕택일 것이다. 나의 부모님은 '가난'과 '가난한 이들을 양산하는 사회'에 대해 반대하시기 때문이기도 하다. 부모님은 '518 민주화유공자'다. 유신 치하에서 대학을 다니던 부모님은 민주화운동을 하다 구속되어 고문의 후유증을 가지고 사신다. 두 분의 첫 만남은 심지어 서대문형무소 앞에 길게 늘어선 즉결심장이었다.
나의 부모의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들은 나와 그녀, 그리고 우리 아이의 이야기도 평범하지 않게 만들어줬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수입을 아버지께 타 쓸 수 있었고, 9월에 태어난 아기의 출산과 육아에 드는 대부분의 비용을 아버지에게 빚질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부터다. 언젠가 운동이 취미활동이 되는 것조차 못마땅했던 아버지에게 결혼, 출산, 육아, 그리고 생존까지 전적으로 떠넘긴 나는 취미활동을 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선택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으면 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