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희망의 버스' 기획단 송경동 시인이 15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앞에서 경찰조사에 대한 자진출석에 앞서 '희망의 버스 계획과 경찰수사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마친 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와 희망버스 참가자들로부터 격려를 받고 있다.
유성호
김진숙이 크레인에서 내려왔다. 35m 허공에 갇혀 있던 김진숙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다. 309일 만에 살아 웃으면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뒤, 다섯 달의 수배생활을 스스로 청산하고 경찰에 자진 출두했던 '거리의 시인'이 세상 뒤편 철창 안에 하릴없이 갇혔다.
김진숙을 향해 희망의 물줄기를 대었다는 게 체포 이유였고, 다른 곳에서도 희망을 얘기할지 모른다는 게 구속 이유였다. 6월 11일 1차 희망버스를 시작으로 다섯 번의 희망버스를 기획하고 이끌었던 송경동 시인이 지금 부산의 한 유치장에 갇혀있다.
송경동, 그의 일상이 시였다나는 지난여름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3차 희망버스를 며칠 앞두고, 떼쓰듯 찾아간 자리였다. 그는 한 달 넘게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며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넘겼고, 사무실 한쪽에는 미처 개지 못한 침낭이 고단하게 구겨져 있었다. 여기저기 반복되는 취재요청에 지칠 만도 한데, 희망버스를 입에 올리는 그의 눈빛은 여전히 형형했다.
버스에 '희망'이란 모자를 씌우고 거대 자본 앞에서 '깔깔깔' 웃어댈 수 있는 그 상상력과 배짱은 어디서 온 것일까, 나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와 나를 포함하여 마흔을 넘긴 이들이 여태 삶을 살아낸 방식은 그런 게 아니었다. 고백하건대, '선봉에서 가열차게 투쟁'하는 것 말고는 아는 게 별로 없는 인간군들이라는 말이다.
"희망버스는 새로운 실험이에요. 경직성이나 엄숙함, 잘못된 권위를 넘어서고자 하는 가슴 떨리는 실험인 거죠. 하지만 그건 무거움을 희석하거나 위장하려는 것과는 달라요. 자본과 사회가 주는 허위의식을 걷어내기 위해 지금 우리한테 필요한 건 주눅들고 절망하고 슬퍼하는 방식이 아니라 더 당당하게, 낙관을 잃지 않고 즐겁게 나아가는 걸 거예요." 그는 누구보다 솔직하고 섬세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고루해가는 지난 시절을 기어이 딛고 넘어서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낙관을 잃지 않고 즐겁게' 진심을 담아내고 '당당하게' 힘을 모으는 새로운 방식의 싸움은 그렇게 일구어진 것이다.
돌아보면 지난 몇 년 동안 그는 늘 벼랑끝에 몰린 사람들과 함께였다. 평택 대추리에, 용산 참사 현장에, 콜트콜텍 노동자들 곁에,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싸움 구석구석에 언제나 그가 있었다. 보수언론들이 그를 '시인의 탈을 쓴 전문시위꾼'이라 부른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무식한 소리 함부로 지껄이는 자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거리의 시인'은 지금껏 어느 한 순간도 시 쓰는 일을 놓아본 적이 없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삶을 사는 일이니, 당장 글자로 쓰지 않을 뿐 삶의 모든 시간들이 시를 쓰는 과정이지요. 결국 시란 나의 상황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고, 그렇다면 희망버스야말로 진짜 멋진 시 아닌가요?"
허허허, 그렇게 그가 웃었더랬다. 희망버스의 종점이 어디냐 묻는 나에게 김진숙이 85호 크레인에서 안전하게 내려오는 것, 또 한진중공업 외에도 쌍용차, 재능교육, 발레오공조코리아 등 우리 사회 모든 현장의 정리해고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물꼬를 트는 것이라 선뜻 답하더니, 잠시 후 좀 멀리 있는 종점도 있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희망버스를 탄 모든 이들이 자신의 꿈을 향해 끝까지 나아가는 것, 이왕이면 기존의 관습을 넘어 즐겁고 강인하게 그 길을 가는 것이 희망버스의 진짜 종점일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그를 인터뷰하기 하루 전날, 그에겐 두 가지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오전엔 끝내 체포영장이 발부됐다는 비보가, 오후엔 제29회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하게 됐다는 낭보가 하루에 다 도착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체포영장 소식이 오히려 무슨 큰상 소식처럼 들리고, 문학상 수상 소식은 시인의 삶이라는 엄중함 때문인지 자꾸 어깨가 무거워진다고 했다.
그때 통보받은 그 문학상의 시상식이 엊그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그의 이름이 적힌 자리는 내내 비어 있었고, 아이 손을 잡고 그 자리에 온 그의 아내가 대신 수상소감문을 읽었다. 그가 바다내음 나는 남도의 끝 작은 유치장에서 한 자 한 자 써 보낸 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