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집회가 있던 지난 11월 22일 저녁, 북아현뉴타운 1-3구역 상가세입자 대책위 회원 정혜신씨를 그녀의 가게에서 만났다.
전민성
쌀쌀해진 날씨에 진행된 촛불집회가 끝나고, 즉석에서 참가자들은 따끈한 오뎅국물과 김밥 한 줄씩을 대접받았다. 북아현 뉴타운1-3구역 상가세입자 대책위 회원인 정혜신(60)씨가 자신의 가게에서 손수 준비한 김밥과 국물이었다. 촛불집회가 끝나고, 오후 9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12시간 동안 가게를 돌보는 정혜신씨를 방문해, 짧게나마 살아온 이야기와 현재의 심경을 들어보았다.
열심히 앞만 보고 왔는데 다른 곳에 터 잡을 엄두 안 나
- 언제부터 장사를 시작하셨어요? 정혜신(이하 '정'): "2003년도 처음 시작했어요. 8년 장사했어요. 세검정에서 전업주부로 살다가 여기로 왔어요. 남편은 2004년 만성 신부전증으로 투석을 하다가 돌아가셨구요.
언니와 함께 동업으로 시작했어요. 언니가 한 번 해보자고 했어요. 내가 자본금 더 내고 시행착오 거치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처음에는 사람 다루는 경험이 부족하고, 음식 만드는 것도 부족해서 여러 가지 부딪히는 것도 많았어요. 여기서 아이들 가르치고, 학교 모두 졸업시켰는데, 지금은 막막합니다.
현재 언니, 조카, 며느리와 함께 일하고 있어요. 이대로 쫒겨 나간다면 앞길을 감당하기 어려워요. 직원들 생활고며 월급을 주지 못할 것을 생각하면 잠이 안 와요. 모두들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고 있어요. 잘 타결되면 좋겠어요. 많은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길에 나 앉을망정 '여기가 끝이다' 생각하고 있어요. 직원들 취직 안 되고 1개월이라도 놀면 의료보험이라도 해 줘야 하지 않아요? 영세업자가 힘겹게 이끌어 나가는데,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되요.
(저 자신은) 노후대책도 없이 앞길이 막막해요. 다른 곳 가서, 또 시작하려면 성공 보장 못하잖아요. 경제도 많이 힘든데요. 저는 여기서 성공했어요. 하루 12시간 이상 일해서, 한 달 벌면, 언니랑 반씩 나누고요. (이런 절박함을) 어디 가서 호소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가게를 비워줘야 하는 것은 예상 못했던 것이에요. 열심히 앞만 보고 왔는데, 어느 날 손님들이 '맛있다'고, '집에서 먹는 밥 같다'고 하면서 손님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 속으로 '내가 복 받았구나' 생각하면서 마음속으로 웃음이 지어지곤 했어요. 그런데 결과가 이것이라니요.
어디 가서 단골손님을 다시 만들 수 있을까요? 여기는 저희가게 단골이 많아요. 어디 가서 터 잡을 엄두가 나지 않아요. 아파트와 상가를 지으면 우선 분양권을 준다든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IMF때 남편의 부도로 생활전선 뛰어들어
- 장사를 시작할 때 다른 직종도 있을 텐데 왜 김밥집을 시작하셨나요? "우리도 밥 먹고, 식구도 밥 먹고 하니까요. 남편의 사업이 IMF 때 부도가 난 후, 처음에는 제가 종로에 있는 직업소개소에 갔었어요. 경험도 없고, 그 때 나이도 50대니까,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어요.
그러다가 벼룩시장 구인광고를 보고 김밥집에 취직을 했어요. 신촌기차역 근처에서 2달간 하루 3~5시간 김밥 마는 교육을 받고 일을 시작했어요. 면접을 보러 갔는데, '김밥 마는 일 하는 사람치고는 나이가 있지만, 성실해 보인다'고 하면서 취직이 됐어요. 월급은 많지 않았지만, 벌어먹고 살아야 하니까, 빚도 있고 해서, 열심히 일했어요.
그런데, 김밥이 아주 잘 팔리더라고요. 김밥을 말아서 수북이 쌓아 놓으면 그게 금방 팔리는 거예요. 그래서 '그래, 저걸 한 번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월급받는 것보단 장사를 하면 더 낫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가진 돈을 모두 투자하고, 제가 조금 더 많이 언니는 조금 적게 투자해서 언니와 함께 시작한 거예요."
의식불명 남편 한 달간 간호하면서도 가게 문 열어
- 남편은 어떤 분이셨나요? "아주 자상한 분이었어요. 또 전통적인 한국남자였어요. 여자는 집에서 일하고 남자는 밖에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사강블록'이라고 옹벽을 쌓을 때 사용되는 블록을 만드는 사업을 하셨어요. 그런데, IMF때 부산에 있는 다른 회사와 함께 필리핀에 호텔을 짓는 프로젝트를 하면서 부도가 났어요. 사업이 잘 안되니까, 그것이 속으로 병이 되었나 봐요. 원래 당뇨가 있었는데, 만성신부전증이 오더니, 투석을 하게 되었어요. 2005년 발병 후 2006년 8월 돌아가셨어요.
복막투석 알아요? (복부쪽에 손가락으로 구멍을 낸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것을 혼자서 하니까 자꾸 감염이 되요. 그러다가 복막이 망가지고 결국 혈액투석을 하게 되었지요. 1년 8개월을 투석을 했어요. 그러다 갑자기 뇌출혈이 와서 쓰러졌는데 의식불명으로 한 달간 중환자실에 있다가 돌아가셨어요. 그런 와중에도 하루도 가게 문 닫아본 적 없어요. 밤에 일하고 돌아와서 병간호 하고, 잠깐 자고 다시 가게 나왔어요. 애들 있는데, 잘 해야지 하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남편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강요하거나 간섭하는 분이 아니었어요. 공부를 하고 싶다면 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도록 믿고 지켜보는 분이었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스스로 알아서 제 진로를 결정하고, 개척했어요. 딸아이는 전문대 졸업 후 증권회사 다니다가 중국유학 다녀오고, 아들도 대학 졸업 후 취직해 회사를 다니고 있어요.
저는 이 가게 너무 사랑해요. 너무 열심히 일해서, 제 인생이 여기에 있거든요. 지난 8년 동안 매일 저녁 9시 출근해서 다음날 아침 9시에 집에 가요. 언니는 낮에 일하고 저는 밤에 나와요. 저희는 1년 365일 24시간 동안 추석과 구정 이틀 빼고 문을 열어요. 이런 제 마음(이 가게에 대해 제가 갖고 있는 애정) 저희 아이들도 잘 모를 거예요.
가족들 모두 식사는 가게에서 해결해요. 집에 가면서 김밥 하나 가져가든지, 잠깐 들러 찌게랑 밥 먹고 가든지 해요. 여기서 쫓겨 나간다는 생각에 편안한 마음이 없이 심신이 힘드니까, 장사가 잘 안 돼요. 심적 고통이 너무 커요. 저는 결국 성공했어요. 이런 작은 가게 하나 꾸려온 것, 성공했다고 하는 것 얼마나 소박한 욕심인가요?"
재개발에 세입자 참여부분 없어 민주국가라 보기 어려워
- 현재 법적 절차가 어디까지 진행되어 있나요?"중앙토지위원회의 감정평가가 끝나지 않았는데, 명도 소송이 끝났다며 이사 가라고 하는 거예요. 판사님께서 무료 변호사가 있다며 소송을 해보라고 했지만, 일반 변호사를 만나 봤더니 소장을 작성하는데 40만원 달라고 하더라구요. 매일 매일 벌어 생활하는데 그 돈 너무 많아서 제대로 (법적으로) 대처하지 못했어요.
재개발에 세입자가 참여할 수 있는 부분이 없어요. 어떻게 되는지 의견 묻고 하는 것이 전혀 없어요. (재개발 법에서) 영세 상가세입자는 아무런 권한이 없어요. 직접 이런 일을 겪어 보니 (한국은) 민주국가가 아니예요. 지역의 문제인데도 돌아가는 것은 모두 집을 가진 사람들 중심으로만 해요.
근처에 자리라도 잡아주면, 이 식구들 데리고 나가서 장사 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해주면 좋겠어요."
인터뷰 후기
현재 서울의 많은 지역이 뉴타운이라는 이름의 재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한 지역 구의회 의원의 말을 빌리자면 '내 집을 파는데 얼마를 받는지도 모르고 계약부터 하는 꼴'이라고 한다. 그 과정과 절차에 많은 하자와 오류가 있다는 의미였다. 민주주의에는 여러 가지 원칙들이 있지만, 그 중 가장 우선해야 하는 것은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현재 토지보상법에는 일정규모 이상의 재개발의 경우, 구청장과 세입자를 포함한 관계자들이 모여 '영업보상협의회'를 구성하도록 되어 있지만,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영세세입자들의 의견과 이해가 재개발 과정에 전혀 반영이 되지 않는 것이다.
간략하게나마 인터뷰가 끝난 정오가 가까운 시간, 연신 하품을 하면서 '내일은 낮 당번 시간을 조금 줄여달라고 말해 봐야겠어요.'라고 말하신다. '밤에 피곤할 때는 어떻게 하세요?' 라고 물었더니, '그냥 식탁에 엎드려 있거나, 낮에 가서 자니까요.'라고 말하신다.
인터뷰 마지막에 '제가 살고 있는 북아현3구역은 특히, 일용직 노동자를 포함한 저소득 세입자분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말이 나오자, 얼른 일어나 김밥을 마신다. '내가 김밥 두 줄 싸 줄게요. 집에 가서 아이와 함께 먹어요.' 입을 굳게 다문채로 능숙한 솜씨로 양손을 움직이며 김밥을 마는 그녀의 모습에서 강한 의지와, 약자에 대한 '본능에 가까운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가 필요한 것은 가진 것을 나누고 약자를 배려하는 그런 용기와 미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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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동네의 성미산이 벌목되는 것을 목격하고 기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2005년 이주노동자방송국 설립에 참여한 후 3년간 이주노동자 관련 기사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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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법, 공동체 파괴하고 건설사만 배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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