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떡을 사이좋게 나눠먹는 삼형제.
강정민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스물일곱에 첫 아이를 낳았다. 내가 한 아이의 성장에 제일 중요한 존재가 된 것을 온몸으로 깨닫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엄마라는 이름에 얼마나 많은 제약이 뒤따르는지 알게 되는 과정은 내게 힘겹고 외로웠다.
점심을 제때 먹을 수가 없었다. 졸졸 따라다니며 안아달라 우는 아기 때문에.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점심때가 되면 내가 먼저 낮잠을 자는 것이었다. 그럼 아기는 내 옆에서 놀다 잠이 들었다. 한 시간 정도 자다 일어나 아기가 깨기 전에 후다닥 늦은 점심을 챙겨 먹었다. 그리고 친정 엄마가 퇴근하는 시간을 기다려 친정으로 전화를 했다. 내게 엄마는 "아기 키울 때는 남이 다 차려준 밥 먹는 것도 힘든 거야. 오늘, 밥은 어떻게 챙겨 먹었니?" 하고 물으셨다.
엄마는 또 "옛날에 한 거지 할머니가 어느 집에 동냥을 갔대. 그런데 그 집에서 할머니한테 '힘들게 동냥 다니지 말고 우리 집에서 아기 키우면서 편하게 지내세요' 했대. 그랬더니 그 할머니가 동냥 그릇도 버리고 도망을 갔댄다. 아기 키우는 게 제일 힘들다는 것을 할머니는 아는 거지. 오죽하면 그런 이야기가 다 있겠니?" 하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다독여주시고 안쓰러워하셨다. 그렇게 나는 전화통을 부여잡고 그 시절을 버텼다. 그리고 매일 밖에 나가 일할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바랬다.
아이의 첫돌 무렵, 기다리던 취업을 했다. 6개월 계약직이었다. 다행히 집 근처 국공립 어린이집에 자리가 있어서 그곳에 아이를 맡겼다. 난 보육기관에 돈만 내면 육아가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칼퇴근' 해서 어린이집에 뛰어가면 아이는 언제나 혼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이는 아무 예고도 없이 열이 나고 아팠다. 약을 먹어도 좋아지지 않았다. 어찌 그렇게 감기가 오래갈까 이상했다. 결국 감기가 떨어지지 않는 아이를 친정에 맡겼다.
아이는 어린이집에 딱 두 달 다녔다. 그때 알았다. 아이 할머니와 같은 분의 도움 없이 맞벌이 부부가 자신들만의 힘으로 아기를 키우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내가 이상으로 생각했던, 부부가 같이 벌고 같이 가사를 책임지는 결혼생활의 상이 와르르 무너졌다. 내가 생각했던 결혼과 현실은 달랐다. 완벽한 착각이었다. 직장의 계약기간이 끝나면서 나는 다시 전업주부가 되었다. 또 다시 친정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는 것이 미안했다. 친정 엄마 역시 힘들어하셨다. 아이가 클 때까지 취업에 대한 마음을 접기로 했다.
'아이 셋 낳은 건 자기 재능은 포기한 거지...'몇 년 뒤, 주말에 잠깐씩 일을 할 기회를 얻었다. 아직 둘째아이가 태어나기 전이었다. 나에게 일을 주었던 사람은 자신이 아이가 셋이라 하며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내는 저보다 재능이 많아요. 그런데 아이 키우느라 그 재능을 썩히고 살고 있어요. 그래서 본인도 너무 힘들어하죠. 아이들을 빨리 키워놓고 자기 재능을 펼쳐야 할 텐데…." 나는 예의상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주었다. 하지만 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아이를 셋이나 낳았으면서 또 사회에 나오려 한다고? 그게 가능한 일일까? 아이 셋을 낳은 순간 자신의 재능은 어느 정도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 사회가 그렇게 아이 키우고 다시 사회에 복귀하려는 엄마들에게 기회를 주는 사회는 아닌데….' 그렇게 생각했던 내가 이제 아이 셋의 엄마가 되었다. 내가 그 위치에 서고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나도 하나의 사회인으로 사회와 직접 관계를 가지고 살고 싶어졌다. 그 욕구는 아이 셋의 엄마라도 똑같이 존재한다. 그때 이야기 속에 등장했던 아이 셋 엄마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셋째를 키울 때, 앞서 두 아이를 키운 경험이 있었지만 여전히 육아가 힘들었다. 서른 후반의 나이라서 몸도 힘들었고 무엇보다 격리와 단절이 형벌처럼 느껴졌다. 젖먹이 아이는 한 시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화장실에 볼일을 보러 들어갈 때도 젖을 물고 놓지 않는 아기를 안고 들어간 적이 있다. 아이가 어려 유모차를 이용한 외출도 불가능했던 시기에는 베란다 방범창이 형무소의 철창처럼 느껴졌다.
초등학생인 큰아이가 하교하며 싣고 온 바깥 세상의 내음을 맡을 땐 기운이 났다. 심지어는 전화요금 고지서도 나에게는 신선했다. 나와 집은 멈춰 있었지만 그것들은 살아 있었고 향기로웠다. 택배 아저씨의 방문도, 우편물도, 현관 밖으로 배달되는 신문도 나와 바깥세상을 연결해주는 고마운 빛이었다.
아이가 유모차를 탈 수 있게 되면서 나는 또 갈증을 느꼈다. 유모차가 다니는 길로만 다녔고 아이가 유모차 외출을 감당할 수 있는 한 시간 안에 돌아와야 했다. 그런 내 처지가 꼭 이 도시에 유배당한 죄인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속으로 더욱 더 갈망했다. 아이가 자라기만 하면 집에서 벗어나 훨훨 날아보리라. 줄 끊긴 연처럼 저 하늘 끝까지 날아가보리라.
이제 내 이름 석 자, '강정민'으로 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