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수지김 사건 은폐 규탄 기자회견
이주영
그렇다면 어떻게 평범한 여인의 죽음이 무시무시한 간첩사건으로 조작될 수 있었을까. 어떻게 모든 국민들이 이 거짓말에 깜빡 속아 넘어갈 수 있었을까. 이 거짓말의 시작은 굉장히 허술했다. 아내를 살해한 윤태식은 사실 처벌이 무서워 월북을 기도했다. 살해 다음 날 홍콩을 떠나 북한 대사관이 있는 싱가포르에 도착한 윤씨는 북한 대사관에 입북의사를 밝혔으나 거절당하고 만다. 그는 다시 미국 대사관으로 찾아가 망명의사를 밝혔지만, 한국 대사관으로 신병이 넘겨졌다.
대사관에서 안기부 요원 등으로부터 조사를 받은 윤씨는 결국 아내 살해와 입북 시도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아내는 북한 공작원으로 그와 함께 조총련계 공작원들에 의해 납북될 뻔했다가 탈출했다"고 거짓 진술을 하고 만다. 그의 거짓 진술은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의 전신)의 도움을 받아 언론에 대서특필된다. 안기부는 그것도 모자라 윤씨의 기자회견까지 두 차례씩이나(태국 방콕과 서울에서) 마련했다.
기자회견을 마치면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될 줄 알았던 윤씨, 그러나 김포공항에서 한 기자회견 뒤 곧바로 안기부 남산분실로 연행되어 홍콩을 떠난 이후 행적을 집중적으로 추궁받게 된다. 안기부 직원 앞에서도 기자회견 때와 같은 거짓말을 했던 윤씨는 "북한은 그런 식으로 공작하지 않는다"며 몽둥이를 휘두르는 안기부 직원에게 흠씬 두드려 맞은 후, 다음날 새벽 "내가 아내를 살해하고 처벌을 피하기 위해 자진월북을 시도했다"고 실토했다.
이때 안기부는 사실관계를 바로잡고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안기부는 진상발표를 하는 대신 철저히 수지 김 사건을 '대공사건'으로 만들어나갔다. 기자회견을 주선하는 과정에서 윤씨에게 싱가포르 주재 미국 대사관에 들렀던 사실까지 숨기도록 지시했으니 말이다.
또 이후 4개월간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은 윤씨는 살인, 납북미수, 폭행치사 등 3가지 경우에 대한 시나리오를 숙지하는 교육까지 받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 후에도 안기부는 윤씨를 10여 년간 출국금지 시키는 등 지속적으로 관리했다. 이런 뻔뻔한 행동을 저지른 안기부에게도 나름의 변명거리가 있다.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장세동이 한 말을 옮겨 적는다.
"정확한 일자는 생각나지 않지만 대공수사국장이 저에게 윤태식의 자백 내용을 보고했습니다. 당시 보고를 받는 순간 너무 황당해서 짜증이 난 상태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당시는 남북한이 서로 헐뜯는 민감한 상황이었습니다. 북한의 역선전 빌미를 주지 말고 상황을 고려해서 적절한 시기를 선택해 잘 처리하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사법처리를 할 적당한 시점까지는 일단 덮어두고 있으라는 의미였습니다.물론 허위 기자회견을 한 후라 '조직이 망신을 당하겠구나' 하는 가벼운 부담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관계자들이 윤태식을 조용히 검찰에 송치할 걸로 알았죠. 사실 윤태식은 평범한 홍콩교민이고 정보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그 처리만 남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해 5월 26일 갑자기 안기부장 직위를 그만두었기 때문에 윤태식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떠났던 게 아쉽습니다."13년이 지나 드러난 진실... "사건을 묻어달라"결국 윤태식은 살인자로서 법의 처벌을 받는 대신 국가에 의해 '반공투사'로서의 이미지를 얻은 채 석방됐다. 그리고 1987년 1월 26일 밤, 북한 공작원으로 지목된 김옥분은 홍콩 카오룽(九龍) 지역 내 자신의 아파트에서 숨진 상태로 발견된다. 이때도 윤씨는 "내가 그들의 납치에서 벗어나 싱가포르 한국 대사관으로 피신하자 조총련이 나 대신 아내를 보복 살해한 것 같다"고 거짓말했다. 그러나 김옥분의 가족들은 김씨는 간첩이 아니며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 뿐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하였고, 홍콩 경찰 역시 윤씨를 범인으로 지목하였다.
홍콩 경찰은 한국에 수사요청을 했으나 한국의 협조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김옥분의 억울함은 영영 풀리지 않을 듯 보였다. 하지만 <신동아> 이정훈 기자의 추적으로 상황은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1995년 한 언론계 선배의 귀띔을 받고 이 사건을 추적하기 시작한 이정훈 기자는 당시 싱가포르 대사관에 근무했던 사람들과 김옥분의 가족들을 만나면서 사건을 한 꺼풀씩 파헤쳐나갔다.
결국 취재를 시작한 지 약 5년 후인 2000년 1월 <신동아>의 보도를 시작으로, 한 달 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이 사건을 보완 취재해 보도하며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특히 SBS는 이 사건을 수사해온 홍콩 경찰에 국내 언론 최초로 접근해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는 개가를 올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SBS는 남편 윤태식이 범인이라는 심증을 굳히고도 이 부분을 방송에 내보낼 수 없었다.
이 사건을 주도적으로 조작한 안기부와 그 후신인 국정원(국가정보원)이 취재에 협조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윤태식이 법원에 신청한 방송금지 가처분이 받아들여지면서 결정적인 대목이 방송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김옥분의 가족들이 방송을 본 뒤 용기를 내어 2000년 3월 윤태식을 검찰에 고소하게 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그해 12월 서울지검 외사부가 홍콩 경찰의 '수지 김 살인사건' 수사 자료를 입수하며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고, 2001년 10월 24일 윤씨를 긴급체포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또 다시, 진실을 파헤칠 기회를 국가가 묻어버렸다는 사실이 후에 밝혀졌다. 2000년 1월 28일, 홍콩 주재 외사협력관 조아무개 경정은 김옥분 가족들의 제보에 따라 홍콩 현지에서 취재를 벌이던 SBS 취재팀과 만났다고 한다. "윤씨가 부부싸움 중 김씨를 살해했는데 납북미수 사건으로 조작됐다는 의혹이 있다"는 이야기를 취재진에게서 전해 들은 그는 보고서를 작성해 당시 경찰청 외사관리관이던 김아무개 치안감에게 보내게 된다.
보고서에는 "홍콩 경찰이 수지 김의 유력한 살해 용의자로 윤씨를 지목하고 있으며 사법공조조약에 따라 한국 측에 관련증거 일체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내용이 포함돼있었다. 이에 따라 김 치안감은 1월 29일 경찰청 외사분실에 사건을 배당하고 내사토록 지시해 사건 발생 13년 만에 수지김 피살사건에 대한 경찰 내사가 시작됐다.
비슷한 시기 같은 정보를 입수한 김승일 당시 국정원 대공수사국장도 이를 엄익준 당시 2차장(작고)에게 보고했지만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될 경우에 따른 국제문제, 남북문제, 국가정보원의 위상문제 등을 고려, 기존 방침대로 단순 살인사건임을 발표하지 말고 보안을 유지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국정원은 이어 경찰이 2월 14일 윤씨에 관한 조사기록 열람을 요청함에 따라 경찰의 내사사실을 알게 됐고, 엄 전 차장은 "사실이 밝혀질 경우 국제적으로나 북한에게 망신을 당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이무영 경찰청장을 만나 수지 김 사건을 설명하고 수지 김 사건이 공개되면 곤란하다는 뜻을 전하라"고 김 전 국장에게 지시했다.
이에 따라 김 전 국장은 다음 날 오전 10시께 이무영 당시 경찰청장을 방문, "국정원 방침 상 자료제공은 힘들다. 윤씨가 87년 처를 살해하고 이를 대공 사건으로 몰고 갔기 때문에 언론에 공개되면 외교 및 대북문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사건내막을 설명했다. "사건을 묻어달라"는 김 전 국장의 요청을 받아들인 이 전 청장은 다음날인 2월15일 김 전 치안감을 불러 "수지김 사건을 국정원에 넘겨주라"고 지시함으로써 수지김 사건에 대한 내사는 중단되고 말았다.
윤태식은 감옥에 갔지만... 풍비박산 난 김씨의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