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소설 <흑산>을 읽고 절두산을 찾아가다

<흑산> 혹 주인공들의 가혹한 운명... 방관자를 자처한 김훈

등록 2011.12.27 21:16수정 2011.12.27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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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아 너는 물이 아니라 피로 흐른다.
물빛 푸른 고요가 아니라
순교의 피, 거룩한 혈관을 흐른다.


핏물 삼키고 가는 어둠이 아니라
물결 가득 성호의 빗살로 흐른다.

한강아, 너는 피의 역사를 굽이쳐
우리들 가슴에 쏟아 붇고 가는
놀란 침묵이 아니라 성혈로 흐른다.

-시인 이인형. 영혼의 강-

12월 27일 오후 1시 반. 성탄절이 지난 서울시 합정동 양화나루의 오후 풍경은 매우 한적하다. 공용 주차장은 굵은 바람이 숭숭 지나갈 정도로 차가 없다. 주변 산책로에는 몇몇 사람들이 길가에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 쿵쿵 발소리를 내며 조깅을 할 뿐이다. 어제에 비해 날씨가 풀린 탓일까. 오늘은 조깅을 하는 아주머니들의 옷차림이 좀 가벼워 보인다. 답답한 마스크와 두꺼운 패딩이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보는 내가 속이 시원하다.

오늘따라 하늘의 파란색과 뭉게구름의 하얀색이 서로 화사하게 대비된다. 마치 유화마냥 그 경계가 매우 또렷하다. 파라디 파란 하늘은 손대면 아릴만큼 시리게 보인다. 손을 뻗으면 구름에 닿은 손이 그대로 얼어버릴 것만 같다. 


양화나루를 지나는 한강물은 잔잔하다. 물결이 넘실대지만 하얗게 부서질 만큼 격하진 않다. 북쪽에서 강을 내려다볼 때의 기준으로 좌편은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우편으로는 디귿자 다리로 말이 많던 양화대교가 보인다. 양화대교 방면으로 가면 가면 김포와 강화도로, 반대로 국회의사당 방면으로 가면 구리와 양평으로 가는 길이다. 옛날에는 이곳 양화나루를 통해 강화도와 김포를 오갔다. 주변엔 국밥과 새우젓을 파는 저자거리가 있었다.

강가 뒤편에는 커다란 절벽이 홀로 우뚝 솟아있다. 누에의 대가리를 닮았다 하여 '잠두봉(蠶頭峰)'이라 불렸다. 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 '용두봉(龍頭峰)'이라고도 했다. 여기에 올라가면 한강의 물길과 남쪽의 벌판이 훤하게 보인다. 병인양요때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하고 함대를 양화나루까지 진격시킨 이후 이곳은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가 됐다. 지금은 성곽과 포대는 허물어지고 절벽만이 남았다.


 홀로 우뚝 솟아있는 절두산. 원래는 잠두봉이라 불렸다. 위에 세워진 건물은 1967년에 세워진 절두산 성당이다.
홀로 우뚝 솟아있는 절두산. 원래는 잠두봉이라 불렸다. 위에 세워진 건물은 1967년에 세워진 절두산 성당이다. 박종원

피의 역사. 절두산 순교 성지 기념공원을 찾아가다.

140년 전. 1만에 가까운 천주교 교인들이 이 절벽 위에서 처형당했다. 조상의 신주를 모시
지 않고 제사를 폐지하며 죽은 야소(예수)가 임금이 없고 조상 없는 나라를 만든다는 황잡한 요언을 한다는 것이 조정이 말하는 그들의 죄였다.

처형한 시신은 매장하지 않고 절벽 아래로 밀어 버렸다. '잠두봉'이 머리가 잘린다는 의미의 '절두산'(截頭山)으로 불린 것은 그때부터다. 형장이었던 절벽 위에는 현재 절두산 성당과 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1967년 병인박해 100주년에 맞춰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됐다. 시신이 버려졌던 절벽 아래는 한강 산책로로 개발됐다. 한강이 한창 개발될 당시만 해도 절벽 아래는 백사장이었다.

지금 사람들은 이 산책로에서 조깅을 하고,산책을 하며 평화로운 일상을 만끽한다. 처형 당시에 천주교인들이 본 하늘도 지금처럼 시리고 맑았을까? 맑고 평화로운 평일 양화나루 풍경에 피와 살이 튀는 형장의 모습이 대비됐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휑한 느낌이 등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얼마 전 신작인 흑산(黑山)을 발표한 소설가 김훈은 책 말미에 "이 한줌의 흙더미(절두산)는 나의 일상을 심하게 압박하였다."며 소설을 쓴 동기를 표현했다. 그때 그가 느낀 압박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방금 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간 그 무언가와 같은 것일까. 내가 여기 온 것은 김훈이 느낀 그 압박감과 부자유에 대해 이해하고자 함이었다. 창작의 모티브가 된 곳을 직접 찾아갔을 때 독자는 비로소 소설과 동화될 수 있다. 그게 내 생각이다.

 빨마를 든 예수상 사진. 포근한 모습의 예수상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빨마를 든 예수상 사진. 포근한 모습의 예수상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박종원

 두산 순교 성지 기념광장 앞에 세워진 기념물. 굉장히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사람 형상 위에는 순교자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적혀있다.
두산 순교 성지 기념광장 앞에 세워진 기념물. 굉장히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사람 형상 위에는 순교자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적혀있다. 박종원

산책길 중간에 터있는 계단이 절벽 언덕을 향해 나 있었다. 따라 올라가보니 언덕 중턱에 광장으로 보이는 작지만 탁 트인 공간이 보였다. 표지판에 절두산 순교 성지 기념광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곳에 눈에 띄는 기념물이 보였다. 기도하는 신도들의 모습이 사암(沙巖)처럼 까끌까끌한 질감을 가진 불그스름한 돌에 조각돼 있었다. 모두 세 작품이었다.

기념물은 다들 좁고 높았다. 그리고 마음 어딘가를 날카롭게 헤집었다. 합장을 한 채 하늘을 우러러 보는 신도들의 마른 모습이 추상화처럼 단순하게 표현됐다. 마치 고대시대 문명의 유물을 보는 듯 했다. 왠지 모를 이질감과 성스러움이 자연스레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사실 직접 몸으로 천주교를 접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발걸음을 옮겨 성당의 입구로 향했다. 빨마를 든 예수상이 나를 반겨주었다. 성상에 대한 설명을 구리판에 적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여기서 '빨마'는 종려나무를 의미하는데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백성들이 영광을 표현하기 위해 깔았다고 성경은 전한다. 이 예수상은 좁지만 넓고 포근한 기운을 가졌다. 부드러운 선에 가는 몸의 예수, 그리고 온화한 미소와 후광은 포근한 즐거움을 준다.

동시에 이 성상은 엄숙한 권위를 가졌다. 나도 모르게 합장을 하고 성호를 그었다. 성상이 나로 하여금 저절로 합장을 하고 성호를 긋도록 도와주는 기분이었다. 

이십여 미터를 더 걸어가니 노기남 대주교 기념관이라는 곳이 눈에 띄었다. 노기남 대주교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주교로서 <경향신문>을 창간하고 해방 이후 25년간 서울대구교장을 맡은 인물이다. 

 형구돌. 구멍에 머리를 넣고 밧줄로 목을 감아 밖에서 잡아당기는 방식으로 형을 집행하는 사형도구다.
형구돌. 구멍에 머리를 넣고 밧줄로 목을 감아 밖에서 잡아당기는 방식으로 형을 집행하는 사형도구다. 박종원

기념관 입구 오른쪽 앞에 형구돌이라는 구멍 뚫린 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안에는 낡은 밧줄이 매듭져 걸려 있었다. 돌의 구멍 뚫린 곳에 수형자의 머리를 넣고 밧줄을 걸어 목을 매는 데 쓰는 도구다. 구멍 밖으로 나있는 밧줄을 소가 끌면 밧줄이 수형자의 목을 죄는 방식이다. 엽전마냥 생긴 돌에서 갑자기 피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저 낡고 삭은 밧줄 에 과연 몇 명이 목 졸려 죽어갔을까. 밧줄의 검게 삭은 부분이 음침하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기념관을 뒤로하고 성당 방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성당은 절벽 정상에 있다. 정상으로 걷는 중 입구 앞,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이 또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1973년에 최태종 조각가가 성당에 봉헌한 작품이다. 세 부녀자의 꺾인 목, 결박된 손, 하늘을 보며 겁에 질린 눈이 너무나 애처롭게 느껴졌다.

처형 직전 하늘을 보며 예수의 구원을 바랐을, 그 절박함이 가슴을 파고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조각상의 왼발을 만지며 기도를 올렸다. 성당에 가까워질수록 엄숙함은 점점 그 깊이를 더해갔다. 더불어 그곳에 접근하는 나도 진지해졌다.

조각상 뒤편에 탁 트인 공간이 눈에 띠어 잠시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공간 가장자리에 뭔가 모를 비석이 보였다. 척화비였다. 비석은 돌의 묵직함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플라스틱 모형이었다. 병인양요 당시 이곳에 세운 척화비의 원형은 현재 사라지고 없다.

일제 강점기 당시에 뽑혀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건드리면 텅텅! 소리가 나는 빈 플라스틱 모형이 생뚱맞게 세워져 있을 뿐이다. 그래도 모형 속 척화비의 쓰인 글의 내용은 분명했다. 플라스틱 모형임에도 글은 여전히 살아서 번뜩였다. 귀를 찢는 노인네의 호통처럼 머릿속을 후벼댔다.

洋夷侵犯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오니
非戰則和 싸우지 않으면 화친이오,
主和賣國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성당 아래에 위치한 척화비. 대원군이 절두산에 세운 실제 척화비는 남아있지 않다. 대신 플라스틱 모형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성당 아래에 위치한 척화비. 대원군이 절두산에 세운 실제 척화비는 남아있지 않다. 대신 플라스틱 모형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박종원

대원군과 조정이 이 비석을 통해 지키고자 했던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1만 명이 죽어간 절두산에 덩그러니 박혀있는 척화비를 보며 그들이 지키려 했던 것이 조선의 백성이 아님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죽어가는 권력을 살리는데 살고자 하는 이들을 제물로 삼은 종묘사직의 허구성은 길이길이 역사에 남아 조롱을 받을 것이다.

김훈 "흑산은 종교서적이 아니다"

성당에 진입해 박물관이 위치한 2층 난간에서 한강을 내려다봤다. 좀 더 앞에서 보고 싶었지만 절벽의 가장 앞쪽으로 향하는 공간은 철문으로 막혀 있었다. 박물관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성지의 중심인 이곳은 신부님의 허락이 있어야만 접근이 가능하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결국 절벽 가장 앞쪽까지 가는 것은 포기하고 성당 옆 2층 난간에서 간접적으로나마 풍경을 담기로 했다. 만여 명의 신도들이 순교의 순간에 섰을 때, 그들은 이 자리에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생애 대한 집착, 죽음에 대한 공포, 고통을 덜고 싶다는 생각, 가족의 희생에 대한 슬픔과 분노 등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거룩한 밀알, 그 자체가 되고자 천주교를 믿었던 민초들은 아마 없었으리라. 그렇다면 그들은 조정의 탄압이 있을 것을 알고 있음에도 왜 천주교를 믿고자 했던 것일까? 김훈의 소설 <흑산>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주여, 매 맞아 죽은 우리 아비의 육신을 우리 아들이 거두옵니다. 주여,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당신의 주검을 거두신 모친의 마음이 어떠했으리까. 하오니 주여, 우리를 매 맞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를 매 맞아 죽지 않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를 굶어 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 어미 아비 자식이 한데 모여 살게 하소서. 주여, 겁 많은 우리를 주님의 나라로 부르지 마시고 우리들의 마을에 주님의 나라를 세우소서. 주여, 주를 배반한 자들을 모두 부르시고 거두시어 당신의 품에 안으소서. 주여, 우리 죄를 묻지 마옵시고 다만 사하여주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59p)

소설 초입 부분에 소작농의 아내 오동희가 미사를 보고 향을 피우다 관가의 추격을 받게 되었을 때 언문으로 남긴 기도문이다. 기도문에는 단지 매 맞지 않고 굶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문구만이 도드라진다. 당시 지배층의 수탈과 폭력이 어느 수준에 달했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단지 이 소설을 종교소설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그들에게는 천주의 존재 자체보다는 굶주리고 매 맞고 차별받는 상황 속에서 자신을 위로할 무언가가 절실히 필요했을 것이었다. 김훈 역시 10월 20일 교보문고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저는 신앙인이 아니고 따라서 이 소설속의 신앙은 속세와 관련된 부분으로 제한돼 있다"고 했다. 종교박해를 다룬 소설이지만 엄연한 의미에서의 종교 소설은 아니라는 말이다.

실제로 소설은 순교자의 거룩함보다는 140년 전 조선의 정치사회적 모순과 수탈을 집중적으로 묘사한다. 흑산도로 유배 간 정약전의 시중을 들던 창대의 아버지 장팔수가 고등어 다섯 마리를 숨겼다는 이유로 수군진 병졸들에게 맞아 죽는 장면은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장면이다. 위정자들은 굶고 병든 백성들의 불만을 폭력으로 억압했다. 소설에서는 고문하고 곤장치고 참수하는 장면이 수시로 반복된다.

이 소설은 김훈이 4년 전에 발표한 작품 <남한산성>과 일정한 연계성을 가진다. 모두 조선 사회의 모순과 종묘사직으로 대변되는 왕조와 지배층의 유교적 허위의식을 비중 있게 다뤘다. 차이가 있다면 조선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변수의 차이다.

<남한산성>에서는 청나라 군대라는 외부의 폭력이, <흑산>에서는 천주교도를 탄압하는 조선 내부의 폭력이 소설의 가장 주요한 발단을 제공한다. 청나라의 침략에 한없이 비굴했던 조선 조정은 창도 칼도 가지지 못한 백성들을 향해서는 정강이뼈가 부러질 정도로 주리를 틀고 도륙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조정의 폭력은 아이와 부녀자를 가리지 않았다. 모두 허울뿐인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김훈의 역사소설 속 인물들의 시대는 언제나 가혹하기 짝이 없다. <흑산>의 주요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마치 동물의 왕국 속 동물 같다. 조선 말기의 가렴주구한 시대가 하나의 생태계라 한다면, 그 속의 인물들은 서로 먹고 먹히며 살기위해 몸부림치는 먹이사슬 속 동물들과 같다.

흑산 속 가혹한 생태계. 김훈이 방관자를 자처하는 이유는?

<흑산>의 주요 인물은 천주교를 믿었다가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된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 그들의 맏형 정약현의 조카사위 황사영이다. 또 천주교도를 탄압하는 대왕대비 김씨, 황사영을 체포하는 포도대장 이판수, 배교한 전직 포도청 비장 박차돌, 황사영의 종이자 밀사인 마부 마노리, 흑산도 어부 장팔수와 아들 창대, 정약현 집안의 면천 노비로 황사영을 돕는 김개동과 육손, 여신도인 길갈녀와 강사녀, 박차돌의 누나 박한녀 등이다.

조정의 억압이라는 가혹한 생태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선과 악의 잣대는 선명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들이 하는 모든 행위가 그저 (인간답게)살고자 하는 몸부림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 속 각 인물들의 생은 각자의 선택에 의해 저마다 분리된다. 누군가를 죽이는 사람도, 죽임을 당하는 사람도, 또한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흑산도에서 조용히 관조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정약전, 적극적으로 배교(背敎)해 목숨을 부지하고 학문적 업적을 남긴 정약용, 외군을 끌어들여 조정을 무너뜨리려 한 황사영, 자신이 살기 위해 누나인 박한녀를 죽이고 천주교 신자로 위장해 교인들을 색출하는 박차돌 모두 각자가 살고자 한 선택을 한 것이다.

김훈은 관념이 아닌 생존 그 자체와 밀착한 이들을 그리고자 했다. 전작인 남한산성이 대장장이 서날쇠를 비롯한 익명의 백성들이 가졌던 삶의 의욕에 초점을 맞춘 듯이 말이다. 그저 살고 싶고 살아가려 하는 이들의 몸부림을 담담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흑산>은 <남한산성>과 또 다른 공통점을 갖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민초들의 몸부림을 지켜보는 김훈의 시각이다. 그는 너무하다 싶을 만큼 관조적 시각을 견지한다. 선과 악에 대한 가치판단도, 약육강식이 만연한 가혹한 시대에 대한 성토도 없다. 그는 끝까지 이 소설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냉혈한이라서 일까? 그렇지 않다. 천주교인 학살에 대해 심리적 압박을 느껴 소설을 쓴 이가 냉혈한일 리는 없다.

그렇다면 그가 바라보는 가혹한 시대 속 생존잇기는 무엇인가. 그것이 주는 고달픔이란 어떤 의미인가. 김훈은 자신의 에세이집인 '밥벌이의 지겨움'이란 책에서 먹고살기의 고달픔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무슨 도리가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김훈의 시각에서 봤을 때 치열한 세상 속 각자의 생존투쟁은 막을 수도 그만 둘 수도 없는 싸움이다. 이러한 각자의 눈물 나는 투쟁 속에서 역사는 조용히 움직인다. 능력 없는 자는 도태된다는 사회 진화론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정부의 분배정책 자체에 회의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국가나 개인의 능력과 상관없다. 결국 먹고 살기 위해 하는 밥벌이는 누구에게나 고달프다.

서로 얽히고 설켜 살고자 버둥대는 그 자체야 말로 사회와 역사가 일정한 방향으로 가게끔 하는 동력이다. 프랑스 혁명이 '우리에게 빵을 달라'던 외침에서 시작된 것처럼 말이다. 김훈은 그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존잇기의 고통은 죽음만큼이나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그것은 작가 자신이 개입해서 답을 낼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 누구에게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김훈은 그저 바라볼 뿐이다. 김훈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의 처절한 생존투쟁을 말이다.

어찌할 수 없어 관조적이고, 또 그 관조를 견디지 못해 그는 언제나 글을 쓴다고 했다. 그에게 있어서 관조는 관찰이 아닌 동감의 표시다. 때때로 지켜봐주는 것 자체만으로 당사자에게 위로가 되는 때가 있는 법이다. 지켜볼 수밖에는 없지만, 또한 외면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언제나 묵묵히 그것을 지켜보는 모습. 그래서 김훈은 여전히 김훈이 아닐까?

한강의 물빛은 푸른색이 아니다.

 ▲양화나루터에서 찍은 한강의 사진. 다리 너머로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양화나루터에서 찍은 한강의 사진. 다리 너머로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박종원

상념을 끝내고 나니 핸드폰 시계는 어느덧 오후 세시 반을 알리고 있었다. 하늘을 보았다. 태양은 정수리를 기준으로 세 뼘 정도 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한결 따뜻해진 햇살이 한강을 더욱 붉게 빛나게 만들고 있었다. 마치 구릿빛 비늘이 박힌 거대한 뱀이 넘실넘실 기어가는 것만 같다. 저 뱀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삼켜왔던 걸까. 햇살이 서쪽으로 더 기울기 전에 자리를 뜨기로 했다. 부쩍 해가 빨리 기우는 요즘이다.

샛길을 따라 산책로로 내려왔다. 성지를 떠나는 길 출구에서 성모 마리아 조각이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합장으로 성모의 평화를 빌고 이곳을 벗어났다. 절벽 바로 아래 산책로에 진입해 절두산 절벽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절벽은 말이 없었다. 절벽아래 잔디밭에 외로이 세워진 이인형의 시비만이 이곳을 잊지 말아달라고 외쳤다.

"한강아, 너는 피의 역사를 굽이쳐/ 우리들 가슴에 쏟아 붇고 가는/ 놀란 침묵이 아니라 성혈로 흐른다." 

바로 앞에 흐르는 한강을 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탁한 적록색의 물이 콘크리트 벽을 철벅철벅 때리고 있었다. 한강의 물빛은 푸른색이 아니었음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흑산 #절두산 순교 성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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