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중-남구 총선 출마를 준비하고 있는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이 지난 10일 오후 대구시 남구에 위치한 자신의 선거운동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를 갖고 "한나라당 공천 못받는 것을 상상하지 않고 있다"며 "대구 남구에 33평 아파트를 아예 샀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유성호
- 대구 남구로 언제 내려왔나?
"지난해 10월 중순 국회 증인출석이 끝난 이후에 내려왔다."
- 고향(경북 칠곡)이 아닌 대구를 출마지로 택한 이유는? "한 번도 경북 칠곡 출마를 생각해본 적 없다. 내가 초중고를 여기서 나왔고, 대학을 졸업한 후 들어간 첫 직장인 한국델파이(옛 대우기전)도 대구에 있었다. 대구에서 가장 큰 제조업체인 한국델파이의 옛날 이름이 대우기전인데,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내가 창설멤버였는데 탱크박사로 불렸던 배순훈 박사가 사장으로 있었다. 나는 법학을 전공했는데 MIT에서 기계공학를 전공한 그 분에게서 공학적 마인드를 배웠다."
- 현재 한나라당은 MB색깔을 지우려는 분위기가 강한데 MB 최측근인 박 차관이 공천을 받을 수 있겠나? "보수진영이나 한나라당의 지상과제는 정권 재창출이다. 현재 야권이 크게 통합하고 있기 때문에 여권도 작은 차이를 극복하고 통합해 나가야 총선을 잘 치를 수 있다. 그래야 대선에서도 정권 재창출의 여지가 생긴다. 그런 측면에서 친이-친박은 작은 차이다. 친이-친박이 단합해야 한다. 한쪽 세력이 다른 한쪽 세력을 배제해서는 정권 재창출이 어렵다. 그런 큰 차원에서 (친이-친박) 양대세력이 통합하고 협력하는 차원에서 공천과정이 진행될 것으로 생각한다."
- 특히 대구는 박근혜 전 대표의 파워가 센 곳인데. "내가 4년 내내 (공직에) 있으면서 외부 공격를 많이 받았다. 조사해 보니 민주당이 저를 공격한 것이 95번이다. 제가 친이계 일부에서 공격받았지만 친박 의원이 나를 공격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해외자원개발과 관련해 국회 정무위에 증인으로 나갔을 때도 친박 의원들이 많이 도와줘서 있었던 일들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다."
- 한나라당에서 공천을 안 줄 경우 무소속으로 출마할 생각인가? "공천 못받는 것을 상상하지 않고 있다. 대구 남구에 33평짜리 아파트를 아예 샀다."
- 2008년에도 총선에 출마하려고 했던 것으로 안다, 왜 청와대에 남았나? "공천 신청까지 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시절에 제가 당선인 비서실 총괄팀장을 맡았다. 저는 국회에 진출하기를 희망했다. 제가 입법기관에 11년 있었는데 대통령이 일하는 데 국회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MB정부가 많은 일을 하려면 국회에서 뒷받침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렵게 공천 신청 허가까지 받았다. 당시 류우익 현 통일부장관과 임태희 대통령실장이 '박영준은 국회로 보내야 한다'고 6~7차례 건의했다. 그래서 공천을 신청하라고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내일이 공천 심사일인데 오늘 당선자가 나를 불렀다. 2시간 정도 얘기했다. 당선자가 '꼭 청와대에 들어가자, 정부 일도 배우고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국회에 진출하는 것이 제 입신양명을 위한 게 아니라 MB정부에 도움이 되고하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통령의 뜻을 거스릴 수 없어서 공천을 포기했다."
- 대통령이 어떻게 설득했나? "당선자하고 나눈 구체적인 대화 내용을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내가 민간기업에서 9년, 입법부에서 11년, 서울시에서 1년 반 정도 경험했기 때문에 그런 경력을 평가한 것 같다."
"청와대에 6개월밖에 못 있을 운명이라 생각했다"- 당시 대통령의 요청을 물리치고 총선에 출마했더라면 각종 비리 의혹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겠나? "훨씬 덜 했겠지. 그런데 운명인데 어떡하나? 최고통치자의 뜻을 거슬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나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청와대에서 100일 정도 일했다. 그러다가 조금 야인 생활을 했고, 국무차장으로 복귀해 지식경제부 차관까지 지냈다. 그러면서 다양한 행정경험을 쌓았다. 그것이 앞으로 살아가는 데 큰 자산이 될 거라 생각한다."
- 청와대 근무 100일이라면 경험으로는 짧은 편인데 아쉽지 않나? "인수위 시절까지 합치면 6개월 정도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정권 기반을 만드는 시기에 있었다. 10년 만에 정권을 되찾아왔고, 새로운 권력기반을 만드는 과정에서 다양한 역할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100일 만에 청와대를 나와 조금 아쉽긴 하지만. 처음 대통령의 권유로 국회의원 출마를 포기했을 때 '아, 내가 아마도 6개월 이상 못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역대 모든 정부에서 처음 정권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수많은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오래 못 있는 것을 수없이 많이 봐왔다. 그래서 내 운명이 6개월을 넘지 못하겠구나 생각했다."
- 당시에 그런 운명을 직감했나? "역대 정부에서 대통령 가까이서 일하던 사람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봐왔으니까. 6개월은 4월 총선이 끝나면 국회가 새롭게 구성되고 여당도 권력기반이 생기는 걸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면 정권 초기에 빠져 주는 게 당연할 수도 있다."
- 당시 친이계 일부로부터 공격을 안 받았더라면 청와대에 더 있었을 것 아닌가? "공격을 안 받았더라면 더 있었을 수는 있었다. 그런데 짧은 기간이지만 하고 싶었던 일을 80% 이상 했다."
- 100일 만에 청와대에서 물러나 2009년 초 국무총리실 차장으로 발탁되기 전까지는 무엇하며 지냈나? "두 가지를 했다. 내가 대선 과정에서 전국적인 조직을 만드는 역할을 했다. 그 분들이 대선에서 엄청 기여했는데 총선 과정에서 소외된 분들이 많았다. 막상 공천이 시작되니까 대선에서 엄청 기여하고도 공천도 못 받고 역할도 안 주어져 서운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국을 다니면서 그 분들에게 현 정부의 역할이 무엇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등을 얘기하며 그 분들 마음을 달랬다. 이런 것을 하면서 전국을 2달 정도 다녔다. 또 하나는 식견을 넓히기 위해 중동, 베트남, 중국, 중앙아시아, 동유럽 등 해외를 다녔다."
- 외유는 식견을 넓히기 위한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나? "내가 대우에 9년 있었다. 처음 6년간 배순훈 사장을 모셨고, 마지막 3년은 김우중 회장을 모셨다. 기조실 전략팀장 역할을 했는데 전략팀장의 역할이 뭐냐? 당시 김 회장이 세계경영한다며 전 세계를 다녔다. 그동안 세계경영은 상품수출이었지만, 김 회장의 세계경영은 현지에 회사를 세우거나 현지 회사를 확보하거나 현지 자원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당시 외환이 부족한 국가여서 해외투자를 하려고 1만 달러를 가지고 나가려고 해도 엄청나게 엄격했다. 기업투자라고 해도 거의 외환도피범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었다.
나는 그런 세계경영과 관련된 승인업무, 인허가업무를 맡았다. 대우그룹 전체가 하는 모든 해외프로젝트의 국내 승인업무를 한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김 회장의 글로벌 마인드를 배웠다. 우리나라는 해외로 더 뻗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앞으로 뻗어나갈 지역을 다녀본 것이다."
- 그때는 왜 아프리카에는 안 갔나? "아프리카에는 갈 엄두를 못냈다. 아프리카는 시스템이 열악하고 연결고리도 없었다. 아는 분들이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다녔다."
"권력실세? 내가 무엇을 누렸다고 권력실세인가?"- 지식경제부 차관을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는데, 소회가 어땠나? "원래 정치인이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특별히 아쉬울 것은 없었다. 내 스케줄대로 갔던 것 같다. 보람이 굉장히 있었다. 지식경제부가 대한민국 실물경제 70~80%를 책임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 자원의 97%를 수입해서 쓰고 있다. 작년엔 1600억 달러인가 1700억 달러인가를 수입했을 것이다. 그렇게 국가생존을 위해 필요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에서 핵심적인 분야인 에너지 자원분야를 열심히 개척한 것이 보람 있었다.
지난해에 우리가 무역 1조 달러를 달성했다. 에너지 자원은 물론이고 무역도 2차관 소관이다. 제가 지식경제부에 가서 신년계획으로 무역 1조 달러 달성을 잡았다. 그런데 전 간부가 반대했다.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이건 위험하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내가 강력하게 주장하고 최경환 장관이 수용해서 무역 1조 달러 달성을 국가 어젠다로 채택했다. 1조 달러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선진국에 도약하려면 2조 달러로 가야 한다. 무역 2조 달러를 달성하면 1인당 국민소득이 4만 달러가 된다.
그런데 1조 달러를 달성하는 방법으로는 안 된다. 2조 달러를 달성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을 세워야 한다. 2020년, 2025년까지 2조 달러를 달성하려면 대기업 중심, 미중일 중심 수출전략으로 가서는 안 된다.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가 분기점이다. 그동안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의 주요 기반이었던 미국, 서유럽,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일부 국가 등의 구매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대외지향적인 수출전략을 쓸 수밖에 없기 대문에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했다. 그게 아프리카, 중남미, 베트남, 동유럽이라고 생각했다."
- 국무차장으로 복귀하기 전까지 다녔던 해외국가와 겹치는데. "일부 겹친다. 그때는 개인으로 다녀서 정부 관계자들을 못 만났다. 그런데 지식경제부 차관이 되어 가니까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 '권력실세'라는 세간의 평가를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권력이 뭔지 모르겠다. 무엇을 권력이라고 하나? 권력이라면 뭔가 누려야 할 것 아닌가? 내가 개인적으로 무엇 누렸나? 남들이 가지 않는 아프리카, 중남미, 중앙아시아 등 오지만 다녔다. 그런 지역을 다니는 게 권력이라면 권력인가? 그 다음에 총리실에 있을 때 금융위기가 와서 일자리 창출과 사회안전망 보강을 위한 일들을 많이 했다. 고용 및 사회안전망T/F를 만들어 거의 매주 회의를 열었다. 그렇게 해서 25만개 일자리를 만들었다. 특히 사회복지통합전산망은 내 역작이다."
- 그런 업적들도 왕차관, 실세차관이어서 가능했던 것 아닌가? "글쎄… 나는 힘보다는 설득을 통해서 일을 많이 했다. 내가 공무원을 잘 안다. 대우그룹에서 정부를 상대로 인허가 업무를 맡았다. 국회에 가서는 갑을이 바뀐 공무원들을 접해봤다. 서울시에서는 지방공무원들을 접해봤다. 그래서 공무원들의 생리를 잘 안다. 그런데 힘으로 하면 한계가 있다. 그 순간밖에 안 된다. 내가 그 직을 떠나면 다 원위치된다. 그래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고, 하부단위부터 협력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실무자에게 먼저 취지를 설명하고 설득하는 코디네이터로서 일을 했다. 코디네이션이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국무차장은 국정을 조율하고 조정하는 자리다. 지금은 피라미드 사회가 아니다. 지금은 수평적 코디네이션이 중요한 시대다. (내가 코디네이션을 중심으로 일을 했기 때문에) 그런 성과들이 가능했다. 법무부가 얼마나 세나? 그런데 (사회복지통합전산망 구축하는 과정에서) 출입국 자료 등 다 협조해줬다. 국세청도 협조해주었다. (협조해준) 대법원하고 실세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
"이상득 의원은 진작 떠나왔고 내 정치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