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이 지난 10일 오후 대구시 남구에 위치한 자신의 선거운동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를 갖고 광우병 소고기 파동으로 인한 '촛불시위'에 대해 "정권을 상실한 쪽이 광우병 소고기문제를 발화점으로 결집한 측면이 있다"며 "10년 만에 정권교체를 하다보니까 정권 상실로 인한 박탈감이 컸던 것이다"고 말했다.
유성호
"촛불시위 때 국민들을 효과적으로 설득하지 못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 리더십을 어떻게 평가하나? "위기를 맞아 그것을 기회로 만든 리더십은 평가받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고, 한 단계 도약을 위한 기반을 확실하게 만들었다. 다만 위기극복을 우선하다 보니까 서민, 중소기업, 소외계층을 배려하지 못했다. 우리 경제구조가 가진 기존의 관행을 고치는 것에 더 노력할 필요가 있다. 또 대통령이 기존정치에 굉장히 부정적이다. 하지만 정치가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정치를 무시할 수 없다. 최종적인 의사를 조율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니까. 그 부분에 좀 더 관심과 애정을 가졌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워낙 일 중심으로 살아서…."
- 여의도에 거의 안 왔다. "옛날에 내가 보좌관하고 있을 때도 여의도에 많이 안 왔다. 제가 이상득, 김석원, 주진우 등 CEO출신 국회의원들 여러 명 봤다. 기업은 투입되면 1년 단위로 결과가 확실하게 나온다. 하지만 정치는 사람에 투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종의) 자본의 회임기간(return of investment)이 길다. 그래서 옛날에 서울시장 선거를 치를 때 이명박 후보에게 내가 얘기했다. '정치는 벤처다, 100명한테 투자하면 한두 명밖에 못 건진다, 그 대신 그 한두 명이 1000명, 1만명의 역할을 하는 게 정치다'라고. 그런데 CEO출신들은 그 비효율성에 적응하기 어려운 것 같다. 대통령이 평생 일 중심으로 살아서 그것이 위기 때는 강력한 장점으로 빛을 발한다. 하지만 정치부분에서는 늦더라도 천천히 가야 할 때도 있고, 두 발 앞서기 위해 한발 물러설 때도 있다. 그런데 그런 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CEO출신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대통령은 좀 나은 편이었다.
10년 만에 정권교체를 하다 보니까 정치나 권력보다는 정책, 일을 우선시했다. 인수위 때도 정책만 했다. 그런데 그 다음에 (금융)위기가 바로 닥쳤다. 그 위기에 대응하느라 정치부분에서 풀어야 할 게 뒤로 밀렸다. 그런 점들은 좀 아쉽다."
- 그런데 대통령과 CEO는 다르지 않나?"물론 다르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처한 시대상황이 정치적인 부분은 미흡하더라도 이 기회를 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있었다."
- MB정부가 출범한 뒤 최대의 위기는 광우병 쇠고기 수입 관련 촛불시위였다. 당시 대통령 지지율이 3개월 만에 20% 미만으로 하락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는데 촛불집회에 제대로 대응했다고 생각하나? "광우병문제에 대응하는 절차와 과정에서 국민과 공유하는 부분은 미흡했다. 국민들을 충분히 납득시킬 수 있었는데 절차와 과정에서 미흡하고 미숙했다. 그래서 국민들의 오해를 증폭시키고 효과적으로 설득하지 못했다. 그런데 팩트의 문제에서 분명이 사실이 아닌데도 (그 사실을) 국민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미숙했다. 아무리 좋은 정책도 국민이 수용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저는 좋은 정책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국민에게 잘 전달할 것인가를 (좋은 정책 만드는 것) 이상으로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IT시대에는 국민이 모든 정보를 접할 수 있어서 다 똑똑하다. 그렇기 때문에 절차과 과정을 통해 국민들을 충분히 납득시키고 동의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정치가 이루어야 할 과정이고, 소통이라는 것이다."
"전문가에 의한 사실 전달도 먹히지 않았다" - 촛불시위 대응에서 소통이 부족했다는 것을 인정한 것 같은데. "그 부분은 미흡했다. 하지만 10년 만에 정권교체를 하다 보니까 정권 상실로 인한 박탈감이 컸다고 본다. 그게 광우병 쇠고기 문제를 발화점으로 결집했던 측면이 있다. 지난 10년간 민주당 정부가 있다가 (한나라당으로) 정권교체가 됐다. 기존 10년간 민주당 정권을 지지한 분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이 있었을 것 아니냐. 그런 부분들이 촛불시위를 계기로 결집된 거라는 얘기다."
- 그 결집을 보면서 MB정부는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나?"당시 청와대에 상당한 위기감이 있었다. 한 번 불이 붙고 나니까 아무리 진정성을 가지고 국민에게 다가가려 해도 안 먹혔다. 그래서 그게 (2008년) 8월까지 이어졌다."
- 당시 청와대에서는 어떤 대응방안들이 논의됐나? "처음에는 전문가그룹에 의한 사실전달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국민 여론이 한쪽방향으로 형성되고 나니까 아무리 전문가그룹이 뭔가를 제시해도 믿지 않았다. 그러니까 광우병이 수돗물을 통해 전염된다는 등의 황당한 얘기들이 먹혔다. 정부나 전문가들이 하는 얘기는 안 먹혔다. 우리가 성능이 좋은 상품을 만드는 것과 그것을 구매자한테 매력있게 얘기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지난 정부에서는 국정홍보처가 있었다. 기자실 대못질 등 부작용도 많았다. 그런 부작용만 보고 국정홍보처를 없애버렸는데 그런 부분들은 아쉽다.
이제는 국가의 일이 서로 얽혀 있다. 어느 특정부처만의 일은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정책을 알리려면 서로 협력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것을 조율하는 것들을 다 없애버린 것이다. 그래서 어떨 때는 엇박자가 난다. 그래서 내가 총리실에 있으면서 각 부처의 대변인들로 구성된 국정홍보회의체를 만들었다.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 국정에 관한 홍보조정, 홍보협력의 역할을 하는 기구(국)를 총리실에 만든 거다. 그때 청와대 일부 인사들의 반대가 상당히 심했다."
- 국정홍보처 부활을 건의할 수도 있지 않았나? "때로는 형식이 내용을 규정해 버린다. 국정홍보처가 지난 정부 말기에 '기자실 대못질'로 상징되는 언론탄압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있어서 부활로 가는 것은 맞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것(국정홍보처 기능을 하는 기구)이 총리실에 들어가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해서 총리실에 국을 하나 만드는 방향으로 갔다."
- 촛불시위는 MB정부 시기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대통령한테도 그렇고 정부 자체에도 하나의 트라우마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촛불시위가 초기 국정방향에서 굉장한 영향을 미쳤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념적인 분이 아니었다.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국민을 잘 살게 하는 정책이라면 그것의 이념적 뿌리가 좌든 우든 상관없다는 것이 MB정부 실용주의 철학이었다. 그래서 이 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에 버스준공영제 같은 사회주의적인 정책으로 기존 업자들의 노선권을 다 회수해버렸다. 생산수단을 국유화한 셈이다. 이제 이념의 시대는 끝났다고 본 것이다. 한반도만 유일하게 이념대립을 하는 상황이고, 전세계에서 이념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국민을 윤택하게 할 것인가의 경쟁만 남았다. 그래서 미소금융 등 여러 가지 정책을 폈다. 그런데 촛불시위가 등장했다. 그것은 우리의 국민적 홍보가 미숙한 탓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 정권을 상실한 쪽이 더 결집한 측면이 분명히 있었다. 우리 정치지형에서 이념적 부분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이 정권의 운영에서 상당한 부담으로 느껴졌다."
"정권 교체 될 때 인수인계 시스템이 전혀 없었다"- 촛불시위를 계기로 실용주의자였던 이 대통령이 이념적 대결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판단한 것인가?"그렇게까지 보기는 어렵다. 다만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이념적 부분이 중요한 부분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대통령의 생각은 모르겠고, 우리 내부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 '정권 상실의 박탈감'이 촛불시위의 한 배경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런 점에서 당시 촛불시위의 배후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생각하지 않았나?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출범 초기부터 전직 대통령을 안좋게 만드는 부분을 무지무지 싫어했다. 노 대통령이 청와대 이지원 시스템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있는 청와대 자료를 다 가지고 가버렸다. 그런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굉장히 조용히 해결하려고 애를 썼다. 밑에서는 큰 문제이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굉장히 톤다운했다."
- '톤다운'이라면? "이것을 노 대통령을 공격한 출발점이라고 보던데 이건 아니다. 공격할 의사도 없었고, 기본적으로 전직 대통령을 충분하게 예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무관계자들의 처지에서 국가기밀이 보호장치가 안된 채 외부에 가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몇 년 간 쌓인 청와대 자료들이 외부에 있다가 국제적인 해킹이 들어와 빼가버리면 국가적으로 굉장히 심각한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 부분을 굉장히 우려했다.
그래서 돌려달라고 요구했는데 계속 반환을 거부했다. 정권이 교체될 때 인수인계 시스템이 거의 없다. 그런 시스템이 전혀 마련되지 않아서 그 전환기에 국가적 위기가 있으면 큰 일 난다. 이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노 대통령쪽과 이야기를 하는데 총무쪽을 제외하고는 어떤 커뮤니케이션도 안됐다. 개인적 친분을 활용해 얘기를 듣는 수밖에 없었다. 시스템을 통해 인수인계된 게 없다. 건물이 어디 있는지 정도만 확인했다.
원래 2월 25일 0시를 기해 전임 대통령에게서 후임 대통령에게로 권한이 넘어온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마지막 밤을 청와대에 보내길 강력히 원했다. 그런데 0시를 기점으로 대통령이 바뀌고 국군통수권과 청와대의 모든 지휘권을 가져야 하는데 새로운 대통령은 외곽에 있고, 권한을 상실한 전임 대통령은 청와대에 있는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그래도 당선자께서는 하룻밤 더 머무는 것을 승낙했다. 그래서 오전 9시 30분엔가 청와대를 나갔다.
우리는 새벽 6시에서야 청와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전에는 절대 못들어오게 했다. 들어가니까 사무실에 아무 것도 없었다. 책상과 의자밖에 없었다. 그것도 먼지가 자욱했다. 그리고 컴퓨터가 몇 대 남아있는데 아무 것도 없었다. 오로지 인사규정만 남아 있었다. 백지에다 글을 써서 쫓아다니면서 첫 회의를 소집했다. 이틀 동안 이렇게 지냈다. 이거 아주 웃긴 얘기다. 이것은 누구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운영에 관한 문제다."
- 청와대 인수인계 부분은 충분히 검토해야 할 사안인 것 같다."그것은 앞으로 만들어야 한다. 서로 인수인계팀을 꾸려서 분야별로 인수인계해야 한다. 그래야 자연스럽게 인수인계가 이루어진다."
- MB정부부터 시작하면 되겠다. "내가 그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지금 만들고 있을 것이다. 그게 만들어지면 올해 12월, 내년 2월 그런 실수들이 줄어들 수 있다. 내가 이야기 하나 더 하지. 국가위기관리센터가 청와대 지하벙커에 있는데 우리는 그게 있는지조차 몰랐다."
- 국가위기관리센터가 지하벙터에 있다고 보도됐지 않나? "우리는 그게 있는 줄 며칠간 몰랐다. 20여명이 있더라."
- 계속 근무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그렇다. 그런데 철대문으로 닫혀 있었서 자기들끼리만 근무하는 거였다. 그런 부분은 정말 국가적으로 창피한 이야기다. 게다가 지하벙커 안에 기능직만 남아 있었다."
- 기능직만 남아 있었다? "3교대 하는 기능직만 남아 있었고, 거기서 근무했던 다른 사람들은 다 나갔다. 그런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아마 지금은 준비됐을 것이다."
"당선자의 지시에 따라 내각인선에서 정두언 빠져"- MB정부 1기 내각 후보 검증과 인선을 주도하지 않았나? "내가 실무적으로 했다. 나는 선거 때 필드(현장)만 돌아다녔다. 예비경선 때 후보 수행을 했지만 본선 때는 완전히 필드로 빠졌다. 항상 후보의 반대편에 있었다. 후보가 호남을 가면 나는 경상도에 있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있었냐 하면, 경선을 총지휘했던 이재오 장관이 박근혜 후보를 공격한 문제 때문에 경선 직후 백의종군한다. 그때 정두언 의원이 전략기획본부장을 맡았다. 정 의원이 선대위 기구를 다 짜고 인선하고 배치했다. 나는 필드로 가겠다고 자청했다. 명칭도 내가 지었다. '조직1팀장' 이런 게 아니라 '네트워크팀장'이라고. 조직은 이제 피라미드시대가 아니고 네트워크시대다. 그렇게 돌아다녔다.
그런데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는 날 집에 들어가는데 정 의원한테 전화가 왔다. 당선자 지시라면서 다음날 새벽 6시까지 당선자의 가회동 집으로 오라고. 그래서 다음날 새벽에 갔다. 그때 당선자를 처음 봤다. 그동안 완전히 별개로 움직였으니까. 그때 SBS에서 생중계하고 있었다. 안에 들어가니까 당선자가 '지금 정 의원하고 몇 명이서 인수위 구성을 짜고 있는데 당신도 들어가서 간사 역할을 하라'고 했다. 그래서 정 의원한테 서류를 넘겨 받았다. 그걸 보니까 정 의원이 인수위 구성을 다 했더라. 이 후보의 당선이 유력했으니까 미리 짰을 것이다. 다만 실무진들은 구성되지 않아서 며칠간 나와 정 의원이 작업을 했다.
그 다음에 조각과 관련된 작업이 시작됐다. 정 의원이 팀장이었고, 나는 실무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맡았다. 아마도 1월 초였을 것이다. (이명박 후보가 대선에 뛰어들) 초기에 현역의원으로는 정 의원밖에 없었고, 정 의원이 전략기획본부장을 맡았다. 그런데 (인수위가) 정 의원 사람들로 다 라인업이 돼 있었다. 대한민국 여러 세력들이 다 들어가 있었는데 참 대단했다. 그런데 인수위 구성이 발표된 이후에 굉장히 시끄러웠다. 당선자가 추구하는 정책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사람들도 요직에 앉혔다. 또 정 의원 (고시)동기들이 대거 들어왔다."
- 정두언 의원 동기들이 인수위에 대거 들어왔다는 건가? "그렇다. 정 의원이 전략기획본부장을 하니까 대한민국 모든 세력들이 그에게 안 몰려들겠나? 1월 초엔가 당선자가 파리에 가 있던 류우익 실장을 불러들였다. 류 실장이 대통령을 독대하고 나온 뒤에 나를 불렀다. 당선자가 '기존의 인사위원회를 해체하고 당신이 새롭게 구성하라, 다만 그동안 진행된 인사 히스토리(과정)를 알아야 하니까 박영준은 남겨두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당시 조각을 하고 있어서 나도 놀랐다."
- 류우익 실장에게 조각을 새롭게 하라고 지시한 건가. "그렇다. 조각과 인사를 위한 인사추천위원회를 구성하라고 한 거다. 이것은 비공식적인 기구다. 어느날 갑자기 그렇게 됐다. 그래서 인사추천위를 구성했다. 당시 인사추천위 명단은 끝까지 비밀로 하라고 지시를 받아서 그것은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런데 정 의원이 그런 사실을 며칠간 몰랐던 것 같다. 어느날 갑자기 자기가 하던 일을 다 못하게 되니까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하고 일했던 사람 중에 유일하게 나만 남은 것이다. 거기서 정 의원이 오해한 것 같다. 나는 정 의원을 한 번도 욕해본 적이 없다. 한때 모든 걸 행사하다가 하루 아침에 모든 권한을 놓게 되니까 거기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이 어마어마했을 것 아닌가? 그 심정이 이해된다. 정 의원의 거친 표현이 좀 유감이지만 기본적으로 그 심정을 이해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일체 공사석에도 욕해본 적이 없다.
인사 이야기를 해보자. 인사를 하려면 기본자료가 있어야 한다. 그때 중앙인사위가 있었다. 거기에 2만명인가 2만5000명인가 자료가 축적돼 있었다. 그걸 받았는데 자료가 풍부하지 못했다. 그것을 참고해서 새롭게 사람을 서치(조사)해서 해나갔다."
"고소영-강부자 내각 비판에 할 말 많다"- 그런데 인사추천위 안에 인사검증팀을 별도로 뒀나?"부속으로서 인사검증팀을 꾸린 것이다."
- 그 인사검증팀에는 누가 있었나? "다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인사실무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했다. 세금을 제대로 냈는지 봐야 하니까 국세청 사람도 있었고, 범죄부분도 확인해야 하니까 경찰쪽 사람도 있었다. 실무적으로 인사검증 업무를 해야 했기 때문에 전문성 있는 사람들로 구성했다. 직급들이 아주 낮은 사람들이었다."
- 인사추천위에는 누가 참여했나? ."그것을 내가 언급하기는 어렵다. 정두언 의원은 분명이 있었다. 류우익 실장으로 바뀌기 전에는 정 의원이 주도했다."
- 류우익 실장으로 바뀐 후에는? "바뀐 이후에는 제가 기본자료 수집과 검증 업무를 맡았다. 내가 실무간사였다."
- 인사추천위 위원들은 누구였나? "그건 영원한 비밀이라 얘기할 수 없다."
- 영원한 비밀이 어디 있나? "이미 나온 사람도 있다. 나도 있었고, 류우익 실장, 임태희 실장도 있었고, 그 외에도 대여섯명 더 있었다. 우리나라 인맥을 아주 잘 아는 분들을 모셔서 같이 논의했기 때문에 특정인이 인사를 전횡할 수 없었다."
- 그때 인사추천위 멤버들이 정권 실세로 굳어져 버린 측면이 있는 것 같은데. "아니다. 저기에 참여했던 멤버 중에는 지금까지도 직함 하나 못 가진 분도 있다. 한두 명 정도는 어떤 공직에도 나가지 못했다."
- 그렇다면 한두 명 빼고는 인사추천위 위원들이 다 공직에 나갔다는 것인가?"공직도 있지만 공직이라고 할 수 없는 데로 나간 사람도 있다. (인사추천위 위원들이) 몇 명 안되지 않나. 류우익 실장, 임태희 실장, 그리고 약 4명 정도 더 있었는데 두 명은 공직에 못 나갔으니까."
- 하지만 1기 내각 인선부터 '고소영', '강부자' 내각이라는 지적을 받았다."내가 그 부분에는 할 말이 많다. 첫 번째 고려대 부분. 1기 내각을 다시 리뷰해보라. 고대출신이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런데 고대 통계를 어디까지 냈는지 아나? 박미석 수석의 남편이 고대 교수라고 그를 고대 인맥에 넣었다. 언론 통계를 보라. 두 번째 소망교회 부분. 소망교회출신은 강만수 장관 포함해서 두 명 정도밖에 없었다. 곽승준 수석과 박미석 수석을 소망교회 신자로 넣었다. 그런데 곽 수석은 대대로 불교신자다. 세 번째 영남 부분. 역대 정권와 비교할 때 영남출신 비율도 그렇게 높지 않다. 거의 비슷하다. 높아봐야 3~4%로 한두 명 차이다.
네 번째 강부자 부분. 그것에도 할 말이 많다. 노무현 정부 말기 각료들의 재산이 22억 원이었다. 이명박 정부 초기 각료들은 31억 원 정도다. 그런데 강부자로 봤다.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재산을 갖고 있었는데 노무현 정권 후반기에 강남 아파트값 폭등이 있었다. 아파트값이 두세 배 올랐다. 그래서 같은 재산을 보유하더라도 이명박 정부에서는 공시지가가 올라서 가만 앉아서도 몇 억 원씩 올라갔다. 그리고 유인촌 장관의 재산이 백 몇억이었다. 그것이 장관 평균 재산액을 올려놓았다. 딱 그거 두 가지다. 그런데 소위 낙인찍기에 걸리니까 지금도 강부자, 고소영이 회자되잖나.
나는 나중에 제대로 된 통계를 제시하려고 한다. 23명 차관 중에는 고대가 1명밖에 없었다. 고대교우회에서 '고대학살자'라는 얘기를 들었다. 보통 고대출신이 15% 정도 되는데. 정치적 의견이 다른 것은 좋다. 하지만 팩트를 팩트로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팩트를 팩트로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런 합의도 발전도 이룰 수 없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업그레이드되기 위해서는 팩트를 팩트로 인정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청문회 대상 기간을 최근 10년으로 하자"- '팩트를 팩트로 인정해야 한다'는 대목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B정부가 능력있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는 사람을 기용했는지는 의문이다. "인사에서 최선을 고르기란 참 쉽지 않다. 왜냐하면 내가 인사를 실무적으로 지원해보니까 우리나라에서 인사할 때 고려해야 할 게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첫째, 지역 안배, 둘째 여성 배려, 셋째, 학교(대학), 넷째 종교 등을 고려해야 한다. 그 다음에 재산도 고려해야 한다. 15명의 국무위원을 뽑는 데 다섯 개 조합의 퍼즐을 맞춰야 한다. 검증을 하다 보면 어느 한 사람이 탈락한다. 그런데 그와 똑같은 스펙을 가진 사람이 있겠나? 없다. 그러면 퍼즐을 다시 맞추어야 한다. 이렇게 고려해야 할 게 많기 때문에 적임자를 선택하기 어렵다.
또한 고위직 인사의 자질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눈높이가 엄청 높아졌다. 그런 기준에 맞추어 사람을 고르려면 (인사풀이) 정말 협소해진다. 우리 사회에서 국정운영을 수행할 만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 누군가? 60년대에는 군이었다. 이후 관료사회가 성장해 관료가 한축이 됐다. 80년대 이후에는 시민사회가 성장해 NGO출신이나 대학교수, 90년대에는 민간기업가출신이 기용됐다. 군사정부 시절이 끝났으니까 군부를 데려가 쓰는 건 한계가 있고, 관료들도 국민들이 싫어한다. 그래서 관료를 쓰는 것도 한계가 있다.
옛날에 교수를 많이 썼는데 지난 정부 말부터 논문문제(표절) 때문에 많이 낙마했다. 교수들의 또다른 문제는 자녀교육이나 집 마련과 관련된 주민등록문제가 있다. 부동산문제도 많았다. 그 다음에 남은 게 뭔가. NGO출신 아니면 기업인출신이다. 그런데 NGO출신은 10 몇 년 전부터 정부에서 많이 써왔고, 보수쪽 NGO는 아직 덜 활성화돼 있다. 그러면 기업인출신이다. 기업인출신이 능력은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은 돈 많은 사람이다. CEO를 하더라도 주식옵션을 받아 돈이 엄청 많다. 어떤 사람은 타워팰리스를 3채를 가지고 있더라.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걸로 평가되는데 일반 서민들의 눈높이에서는 쓸 수가 없다.
그러면 결국 관료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가 있다. 인사와 관련, 지금의 기대수준을 계속 가져가면 어떤 정부라도 한계에 부딪힌다. 30대에 장관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자기관리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나? 또 인간은 한 번 잘못했다가 다시 반성하고 더 좋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나이 때부터 사돈에 8촌, 증조부, 고조부까지 다 뒤진다. 헌법에 연좌제가 금지돼 있는데도 그렇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인재는 많아 보이지만 막상 검증해보면 정말 얼마 안 남는다. 그리고 전 국무위원이 인사청문회 대상이 된 것은 이명박 정부가 처음이다. 다 청문회에 서다 보니까 (탈락자가) 많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