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의 처소인 경복궁 교태전.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소재
김종성
'김이라는 성은 목(木)이라는 성에 해롭다'이런 관념이 실제 존재했다는 점은 선조 10년 5월 1일자(1577년 5월 18일) <선조수정실록>의 주석에서 나타난다. 광해군 때인 1616년에 편찬된 <선조실록>를 인조 쿠데타 이후인 1643년에 수정했다 하여 <선조수정실록>이라 부른다.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할 때 아래와 같은 주석이 첨가되었다.
"원래 궁중에서는 옛 임금들 때부터 '김이라는 성은 목(木)이라는 성에 해롭다'는 말이 있었다."이처럼 김씨는 이씨 왕조에 해롭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김씨 처녀들은 국혼을 크게 두려워 할 이유가 없었다. 합격 가능성이 낮은지라, 국혼에 지원하라는 압력도 약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조선 전기에는 제2대 정종의 부인인 정안왕후 김씨를 제외하고는 김씨 왕후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았다.
정안왕후 김씨와 결혼할 때만 해도, 정종은 왕권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동생 이방원이 쿠데타를 일으킨 뒤에 자신이 곧바로 왕이 될 수 없으니까 형인 정종에게 몇 년간 왕위를 맡겼을 뿐이었다.
또 김씨가 1355년에 출생한 점을 볼 때, 김씨와 정종은 1392년 조선 건국 이전에 결혼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이들의 혼인이 이루어진 것 같다. 만약 정종이 왕이 될 가능성이 있는 상태에서 결혼했다면, 이들의 혼인은 처음부터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전기만 해도 '김씨 배제 원칙'이 잘 지켜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으로 조선왕조가 일대 충격을 받은 뒤부터 이 원칙은 금이 가고 말았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2년에 인목왕후(인목대비) 김씨가 왕비가 된 것을 시작해서 조선 후기에만 9명의 김씨 왕비가 등장했다. 조선 전기의 정안왕후까지 합하면 김씨 왕비는 총 10명이다.
실제로는 왕후가 된 적이 없는데도 나중에 왕후로 형식상 추존된 여인들을 빼고, 실제로는 왕후가 되었는데도 나중에 정치적 이유로 '왕후가 아니었던 여인'으로 격하된 여인들(예컨대, 장희빈)을 더할 경우, 조선시대의 실제 왕후는 총 36명이다. 참고로, 조선 전기의 임금은 14명, 후기의 임금은 13명이다.
36명의 실제 왕후 중에서 김씨가 10명으로 1위, 윤씨가 6명으로 2위였다. 민씨와 한씨가 각각 3명으로 그 뒤를 이었다. 왕후가 될 수 없다는 김씨가 가장 많은 왕후를 배출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조선 후기 지식인들은 이런 현상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임진왜란 직후에 선조가 오랜 금기를 깨고 김씨 왕후를 받아들이자, 당시 지식인들은 이러다가 왕조가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우려했다. 위에 소개한 <선조수정실록>의 이어지는 부분에서 그런 분위기가 나타난다.
"원래 궁중에서는 옛 임금들 때부터 '김이라는 성은 목(木)이라는 성에 해롭다'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여인을 뽑을 때는 항상 김씨를 제외했다. 주상(선조)께서 등극하신 후 3명의 후궁이 모두 김씨인 데다가 인목왕후까지 중전의 자리를 이으니, 식자들은 불길하지 않을까 하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