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처럼 취직하고 싶어? 난 증권사 '몸종'이었다

[내 청춘을 말하다 ②] 고민 끝에 던진 사표... 행복 찾아 떠납니다

등록 2012.01.28 10:21수정 2012.01.28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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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지붕 뚫고 하이킥-짧은 다리의 역습> 미래의 88만원 세대 백진희가 인턴으로 취직을 하기 위해 면접을 보고 있다.

<지붕 뚫고 하이킥-짧은 다리의 역습> 미래의 88만원 세대 백진희가 인턴으로 취직을 하기 위해 면접을 보고 있다. ⓒ MBC


"나도 언니처럼 취직하고 싶어."

스물대여섯 살 되는 후배들은 내게 푸념을 쏟아낸다. 요즘 20대가 대개 그렇듯, 이들도 취업 때문에 고민이 많다. 그러나 나는 이들보다 많아 봐야 두세 살 정도 위고, 이렇다 할 성공을 거둔 것도 없다.

해주고 싶은 이야기? 글쎄, 나도 힘든데 다른 이의 고민이 들릴 리 없다. 그저 웃어넘기려는 내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토익은 몇 점이었는지, 자격증은 뭐가 있는지, 자기소개서는 어떻게 썼는지…. 아무래도 내가 4년간 몸담았던 금융회사가 이들에겐 들어가고 싶은 직장인가 보다.

"'누구처럼'이 어딨어? 원하는 일을 찾아."

원론적인 대답을 했다. 이에 대부분이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무얼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고, 하고픈 일이 있어도 불가능할 것 같다고. 그래서 그냥 적당한 회사에 취직하는 일이 최선이라고 한다. 왜 이렇게 무기력하고 자기 확신이 없을까, 퍼뜩 든 생각은 안타까움이다.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지 못한 채 취업에 전전긍긍하는 건 삶을 소극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다. 적어도 내가 4년간 직장 생활을 하며 느낀 건 그렇다.

사실 나도 후배들을 비난할 처지는 아니다. 졸업을 코앞에 두고서야 나라는 인간의 정체는 뭘까를 고민했다. 그때부터 남들처럼 단순히 취업을 위한 공부를 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었지만, 이력서의 뻥뻥 뚫린 빈칸들이 내 자존감에 구멍을 냈다.


그래서 뭘 하는 회사인지도 모른 채 이곳저곳 닥치는 대로 원서를 넣었다. 그렇게 입사한 곳은 내게 '어떤 삶을 살아야 행복한가'를 절실히 깨닫게 해줬다. 4년간 열심히 다닌 내 직장은, 증권회사였다.

긴장한 면접... 경제 지식은 묻지도 않았다


입사 최종면접 날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금융 분야 지식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경제신문을 샅샅이 뒤져 최근 이슈를 달달 외웠다. 글로벌 인재라는 것을 표현하고 싶어 영어로 자기소개도 연습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다가왔다. 신문과 TV에서만 보던 회사의 중역들을 만나는, 설레면서도 긴장된 자리였다. '똑똑똑~' 면접장 문을 두드렸다.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열자 3명의 면접관들이 앉아 있었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으려는 찰나 "잠깐, 앉지 마세요"라는 말이 들렸다. 나는 당황스러운 상황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잠시 서 있었다. 세 면접관은 위아래로 내 몸을 훑어보며 무언가를 꼼꼼히 체크했다. 면접장은 약 3분간 사각사각 연필 소리, 6개의 눈이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 그리고 흡사 북소리 같은 내 심장 소리로 가득 찼다. 이윽고 한 면접관이 말했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라 인상과 자태를 보고 싶었어요."

누군가 이렇게 대놓고 나를 훑어보는 건 처음이었다. 더구나 외모와 자태를 평가한다니. 이런 얘기는 예쁜 사람 뽑기로 유명한 승무원 면접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도 없었다. 어떻게 꿰찬 최종면접인데….

면접은 아주 간단하게 끝났다. 그야말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전문지식을 요하지도, 다른 역량을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도대체 내 면접 점수는 몇 점이었을까? 아니, 내 외모와 자태는 몇 점이었을까.

입사해서 가장 먼저 배운 건, 남성문화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는 일이었다. 우리가 공공연하게 알고 있는 술·접대 문화가 갈등과 분쟁을 줄인다 걸 알게 됐다. 열심히 노는 것은 능력이고, 적당한 시간에 빠져주는 것은 센스다(소속 팀 구성원 대부분은 남자였다).

단합대회를 하거나 워크숍을 가는 날은 죽음이다. 본부장님이나 대표님을 모시는(?) 술자리는 초죽음이다. 그런 행사가 있는 날에는 정신을 안드로메다로 보내 버리고, 이성이니 주체성이니 하는 것은 개나 줘버리는 게 상책이다. 마시기 싫은 술을 주야장천 마셔야 하는 것도 힘든데, 정말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까지 연출해야 했다. 정신줄을 놓아야만 그나마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

a  폭탄주

폭탄주 ⓒ 권우성


이런 술자리도 기억난다. 14명의 직원들이 돌아가며 본부장님께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업무에 임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런 '결의'를 다지는 곳에 폭탄주가 빠질 수 없다. 한 명씩 포부를 밝힐 때마다 전 직원이 폭탄주를 '원샷'하는 게 규칙이었다! 총 14명이니 14잔 마셔야 했고, 본부장님의 이상한 취향(?)에 따라 모두의 포부가 밝혀질 때까지 안주에는 손을 댈 수 없었다.

사회생활에서 술은 기호식품이 아닐지도 모른다. 개인의 기호는 철저하게 무시되기 때문이다. 모두 취하면 노래방으로 향한다. 노래방에서는 나같이 어린 여자는 스테이지가 고정석이다. 걸 그룹 노래로 흥겨운 분위기를 만들고, 걸쭉한 트로트로 끈적한 분위기도 만든다. 분위기가 고조되고 취기가 꼭짓점에 다다르면 여직원은 빠진다. 아니 '빠져준다'라고 해야 옳다.

취직하면 뭐가 가장 좋을 것 같냐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곧바로 "자유요"라고 답했다. 내 월급으로 사는 물건이 하나둘 늘어갈수록, 과제와 시험에서 벗어나 나만을 위해 쓰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어른이 되는 속도는 더 빨라지고 자존감은 높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퇴근 후 하고픈 일은 약 10여 가지였고, '뭐부터 할까'를 놓고 즐겁게 고민했다.

그러나 내가 그토록 누리고 싶던 자유를 '상사'는 허용하지 않았다. 조직생활에서 '개인생활'이나 '자유'를 운운하는 건 개념 없는 일로 치부됐다. 내가 그 '개념'이라는 것에 민감했던 탓일까? 상사의 "밥 먹고 가자"는 한마디에 그렇게 저항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그 상사가 하필이면 가족과 멀리 떨어져 살거나, 집 밥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들이었다. 이건 거의 인재(人災)였다. 취직하면 보장되는 내 자유? 그건 신기루에 불과했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밥 먹고 가자"는 얘기를 들어야 했고, 늘 밥은 술로 이어졌다. 반항 한 번 하려 하면 "사회생활 그렇게 하는 거 아니다"는 말을 들어야 했고, 소위 말하는 '은따('은근히 따돌린다'의 줄임말)'가 되는 기분이 들어 이내 내 의지를 꺾었다.

'종'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돼

증권회사 특성상 이런저런 변화가 참 많았다. 시장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연예인 스캔들 하나 터져도 마음을 졸여야 한다. 회사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내가 입사한 이후 두 번의 금융위기를 맞았고, 회사 분위기는 자주 냉각됐다. 분위기는 보통 위에서 아래로 전파된다. 그럴 때마다 상사들은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하라면 하고, 까라면 까야지 뭐."
"우리는 그냥 머슴이야. 시키는 대로 해."

조금의 불만이라도 이야기하려 하면, "종 주제에 말이 많다"며 말을 막았다. "좀 힘듭니다"라고 어렵게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나의 상사는 대답했다.

"다 힘들어. 그냥 생각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나보다 10년을 더 근무한 그 상사가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깨달은 것이다. 생각을 비우고 살면 된다는 것. 상사는 덧붙여 말했다. 자신이 뭔가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 뭐가 잘못 됐는지에 대해서도 판단하지 말라고. 어차피 우리는 그냥 머슴이고 종일 뿐이니까, 자꾸 주인한테 대들지 말라고.

그때부터 나는 생각을 단순화하는 연습을 했다. 부당한 일을 지시받아도 '나는 종이다'라는 마음으로 임했다. 문득 화가 나고 분노가 솟구칠 때도 '아, 나는 절대 주인이 될 수 없으니까'라는 마음으로 억눌렀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최면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의미가 있건 없건 시간은 잘도 흘렀다. 사실 4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내가 '종'이라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되뇐 결과다. 한계를 인정하고 나를 그 틀에 끼워 맞추는 노력은 성공적이었다.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부당함과 남성 문화가 박탈해간 내 자유와 건강, 그리고 강요된 복종. 이런 문제에 부딪히면서 많은 갈등을 했다. 금융회사에서의 일이 내가 진정 원하고, 내 삶의 가치와 맞아떨어졌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까?

모든 업무가 돈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게 그렇게도 싫었다. 돈이 따라오는 일이면 거짓말도 서슴지 말아야 했고, 싫어도 좋은 척 늘 웃어야 했다. 진짜 전문가도 아니면서 말로 사람을 현혹시키는 일도 죄스러웠다.

a  2011년 11월 28일 오후 서울 용산구 선린인터넷고등학교에서 열린 '서울시 고교전문인력 채용박람회'에서 한 학생이 두 손을 꼭 쥔 채 면접을 보고 있다.

2011년 11월 28일 오후 서울 용산구 선린인터넷고등학교에서 열린 '서울시 고교전문인력 채용박람회'에서 한 학생이 두 손을 꼭 쥔 채 면접을 보고 있다. ⓒ 연합뉴스


'닥치고 취업' 말리고 싶습니다

직장은 돈,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회사 성장에 한몫을 담당하며 나 또한 성장함을 느끼고,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지위와 급여를 받는 것. 내가 지향하는 직장의 의미다. 그러나 이를 실현하는 게 그토록 어렵다는 걸 4년 전에는 미처 몰랐다.

내 나이 이제 29. 우리 사회는 여전히 청년실업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그럼에도 나는 지난 연말, 사표를 냈다. 스스로 백수의 길을 택했다. 내가 원하는 일, 내 가슴을 뜨겁게 하는 일을 할 생각이다. 더는 이성, 주체성 등을 개에게 주지 않을 생각이다. 물론 고민이나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더 이상 내 행복을 유보하거나 뒤로 미루고 싶지 않다.

나는 남들이 좋다는 것에 휩쓸리고 직접 경험한 후에야 '아, 이건 나에게 안 맞는구나'를 깨달았다. 전체 인생에서 보면 4년이라는 시간은 작은 시행착오일 것이다. 하지만 30대를 목전에 두고 보니 그 4년이 아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를 발견하는 일,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을 찾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생활이 어렵고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닥치고 취업'에 몰두하는 후배들을 말리고 싶다. 청춘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평생 해도 행복하고 보람 느낄 수 있는 일, 난 지금 그걸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어차피 힘든 세상, 하고 싶은 일 하며 살아야 그나마 견딜 수 있지 않겠나.

다시, 후배에게 묻고 싶다.

"아직도 언니처럼 취직하고 싶어?"
#청춘 #취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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