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학교 간 인사이동을 앞두고, 특히나 올해 학교에서 교사들이 가장 기피하는 업무는 단연 학생부장일 것 같다. 작년 말 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 이후 학교폭력 문제가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에 보도되면서 정부는 물론 지역 교육청, 심지어 여태껏 교육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기관들까지 나서서 학교에 대책을 주문하고 있으니, 이 모든 게 당장은 학생부장의 몫이 될 터다.
학생부는 학생, 학부모의 의사를 반영해 학생생활규정을 교육적 목적과 현실에 맞게 손보고, 학급 담임교사를 보좌해 공통된 기준에 따라 상담과 신상필벌을 통해 학생들을 생활지도하는 것이 본연의 업무다. 그러나 올해는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해 추가될 업무가 적지 않을 듯하다.
학생,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한 정기적인 인권 교육과 교사 연수를 실시하고, 학생회와 의회 등의 자치조직을 활성화 시키며, 학생들이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도록 축제 등의 행사를 내실 있게 꾸리라는 주문이야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준비하겠지만, 올 들어 학교를 불신하고 교사들을 되레 소외시키는 대책과 전시성 행사를 주문하는 방안들이 무차별적으로 학교에 뿌려지고 있어 우려가 크다.
예컨대, 정부는 전국의 모든 학교폭력 사례를 전수조사 한답시고 학교에 설문용 가정통신문을 일괄 발송하게 한 다음, 재송용 봉투를 첨부해 학교가 아닌 교과부로 보내도록 했다. 지금껏 정보공시 등을 통해 학교폭력이 잦은 학교에 불이익을 주는 등 학교더러 은폐를 부추겨놓고 이제 와서 학교를 믿을 수 없다며 학교폭력을 직접 관리하겠다는 발상이 황당하다.
'군대식 소원수리' 방식으로는 학교폭력을 근절시킬 수 없어
어떻든 학교폭력을 가장 가까이에서 접하고 해결되도록 애쓰는 이들은 교사인데도, 정부는 대놓고 그들을 불신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과 학부모, 교사에게 학교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노력은 가상하지만, 단언컨대 그런 이른바 '군대식 소원수리' 방식으로는 학교폭력을 근절시킬 수 없다. 폭력 '행위'가 아닌 '문화'로 접근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더욱 우스꽝스러운 건, 학교마다, 지역마다 무슨 위원회를 꾸리고, 캠페인성 행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하라는 주문이다. 학교에 매뉴얼이 없어서, 인식이 부족해서 학교폭력이 늘어나는 게 아닌데도, 대책이라고 내놓는 게 거의 80년대 수준에 머물러 있다. 더욱이 유관 기관들끼리의 상호 협의가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내려지는 것이다 보니 엇박자도 이런 엇박자가 없다.
일례로 한쪽에서는 학교 업무 경감 차원에서 각종 위원회를 대폭 축소하라고 요구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학교에 새로운 위원회가 필요하다며 아우성이다. 이름만 있지 회의 한 번 제대로 열리지 않은 위원회가 학교에 수두룩한데도,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자칫 애꿎은 명패와 깃발만 하나 더 제작하게 생겼다.
얼마 전 학기가 시작되는 3월과 9월에 한 차례씩 '학교폭력 예방의 날' 행사를 실시하도록 지시하는 공문이 내려와 씁쓸해 하던 차에, 엊그제(1월 27일)는 숫제 동 주민 센터(옛 동사무소)에서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학생사랑지역협의회'를 학교마다 구성하도록 지시가 내려왔고 관내 초, 중, 고등학교를 비롯한 유관 기관 대표들이 모임을 가졌다.
내용인즉슨, 동장이 주관하여 학교마다 학교장, 학부모 대표, 경찰, 주민 센터 공무원, 주민자치위원회, 새마을협의회, 부녀회 등의 자생 단체로 10여 명의 위원을 구성한 다음, 학교폭력 예방활동, 취약지 순찰과 청결, 질서, 친절 활동 및 결손가정 학생 후원과 결연 사업을 전개하겠다는 것이다.
구성원만 달라졌을 뿐, 십수 년 전 인근 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날짜를 정해 유해 환경 주변을 순찰하던 '교외 지도'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추가된 역할이래야 동 주민센터의 협조를 받아 학교에서 기존에 행해지고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물었다. 교외 지도가 유명무실화된 지 이미 오래인데, 설마 이것이 학교폭력이 늘어난 이유로 여기는 것인지를.
"시장님이 지시한 것이고, 어차피 해야 할 거라면 제대로 해보면 어떻겠냐"는 엉뚱한 답변이 돌아왔다. 이름도 외기 어려운 이 조직이 진정 학교폭력을 근절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도 답변은 똑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회의 자료 맨 첫 장에는 '시장님 말씀'이 굵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불과 하루 전에 학교와 유관 기관에 공문을 뿌려 동 주민센터로 서둘러 소집시키는 방식도 그렇지만, 학생선도위원회와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와 같이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조직이 있는데도 굳이 또 다른 조직을 구성하는 이유가 자못 궁금하다.
회원들의 임기는 몇 년이고, 협의회 개최 시기는 언제이며, 활동 예산과 기존의 학교 내 조직과의 역할 분담 방안 등에 대한 실무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이 전혀 마련되지도 않는 상태에서 일단 조직의 구성부터 재촉하는 모양새로 미루어, 오래지 않아 '유령 조직'이 될 공산이 크다.
동 주민센터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토론다운 토론 한 번 없이 회의를 서둘러 마치면서 금후 계획을 공지하는 걸 보니 더욱 그런 확신이 든다. 방학중임을 뻔히 알 텐데도 내달 1일까지 학교별로 위원 추천과 구성을 마치고, 8일에 첫 번째 회의를 통해 임원진을 선출하며, 10일까지 회의 결과를 보고하라는 것이다.
질문에 엉뚱하고 궁색한 답변만 내놓을 만큼 구성을 주관하고 추진하는 사람들조차 뭐 하는 조직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판에, 불과 며칠 내로 학교마다 위원회를 구성해, 회의하고, 선출하고, 결과를 보고하란다. 한 시간 남짓 회의랍시고 앉아 있으려니, 한 개그 프로그램의 비상대책위원회 꼭지가 떠오를 지경이었다. 개그도 이런 개그가 없다.
그런데, 동장이 총대를 메고 이토록 서두르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회의 자료의 말미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2012년 2월 중순, 시(市)의 계획과 연계하여 '학생사랑지역협의회' 발대식에 참석해야 한단다. 광주광역시 관내 학교 수를 감안하면 대략 3천 명 정도가 모여 성대한 행사를 치른다는 것인데, 그야말로 전형적인 '보여주기식' 발상이다.
학교폭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킨답시고 무슨 전당대회나 출정식 치르듯, 학교도 아닌 컨벤션 센터 행사장에 모여 피켓을 들고 목청껏 외치는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될까. 백보 양보해서 일정한 효과가 있다 해도, 학교폭력 근절이라는 것을 명분 삼아 시 차원의 행사에 사실상 시민들이 동원되는 셈이다.
학교폭력이 왜 늘어나고 최근 들어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는지 등에 대한 인식과 치열한 고민 없이, 그저 유관 기관으로서 애쓰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부질없는 실적쌓기용일 뿐이다. 한마디로 시대착오적이다.
학교폭력 근절 위해 시에서 앞장서서 챙겨야 할 일은 따로 있다
학교폭력 근절을 위해 정작 시에서 앞장서서 챙겨야 할 일은 따로 있다. 예산을 늘려 방과후에 학교 밖에서 아이들이 맘껏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 등의 문화시설을 대폭 확충하고, 교육청과 협조하여 학교의 역할을 보완하는 상담, 보육, 특성화 프로그램 운영 시설을 지원하고 실질적으로 연계시켜주는 일, 사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것이다.
요컨대, 이유야 어찌됐든 학교폭력이 학교 울타리를 넘어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모든 이들의 지대한 관심을 끌게 된 것 만큼은 분명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진지한 고민과 치밀한 준비 없이 마구잡이로 학교에 하달되는 지침은 학교폭력에 대응해야 하는 교사들의 노력에 힘이 되기는커녕 '잡무'만 늘려 정작 아이들과 만날 시간을 빼앗을 우려가 크다.
더욱이 이와 같은 전시성 행사 위주의 상명하달 방식은 교사들을 쉬이 지치게 해 시나브로 자존감을 훼손한다. 아이들과 살을 부대끼며 그들의 목소리에 맨 먼저 귀 기울이는 사람이 바로 교사다. 무기력한 교사들이 느는 것 역시 학교폭력이 늘어나는 많은 이유들 중의 하나라고 확신한다.
감히 부탁드리건대, 학교마다 할당된 '학생사랑지역협의회' 구성과 구태의연한 방식의 발대식 행사 추진을 재고해 달라. 모르긴 해도, 학교가 학부모 대표라고 추천한 사람들은 이미 학교 내 다른 위원회에서 위원으로 활동하는 분들일 테고, 다른 자생 단체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활동은커녕 구성부터 형식화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사족 하나. 올해 정말 힘든 한 해가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학생부장 보직을 기꺼이 맡았다. 학생인권과 학교폭력을 화두로 삼아 1년 동안 아이들과 즐거운 마음으로 부대껴볼 요량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번 '학생사랑지역협의회' 구성 모임 참석이 올해 학생부장으로서 공식적인 첫 번째 업무였던 셈이다.
물론, 관내 각 기관의 대표가 참석하도록 공문에 명시돼 있었으니 학교장이 왔어야 할 자리였다. 누가 참석했든 그 일은 고스란히 학생부의 업무가 되었을 테니, 차라리 잘 됐다. 그리고 학교폭력이 가장 중요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올해, 학생부장으로서 1년을 일기로 남겨볼 생각이다. 아이들과의 관계는 그만두고라도, 학생부장이 아닌 교사로서 학교생활을 성찰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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