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1월 확대당정협의회에서 권오규 당시 경제부총리가 출자총액제한제도 개편안 등 안건을 설명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는 100여 년 전 미국과 같은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이야기를 이어가기 전에 다음에 열거하는 기업들의 공통점이 뭔지 한번 맞춰보시라.
보나비, 휴먼티에스에스, 스테코, 에스비리모티브, 에스엔폴, 에스코어, 오픈핸즈, 월드사이버게임즈, 이엑스이씨엔티, 지이에스, 에스엠피, 에스티엠….
대부분 독자들에게는 매우 생소할 이름의 이 회사들이 모두 삼성그룹 계열사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아마도 잘 모를 것이다. 삼성 계열사에서 오랜 기간 근무했던 지인에게 물어봐도 모를 정도였으니 일반인들이 알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지 않겠는가.
이처럼 일반인들은 잘 알지도 못할 정도로 삼성 계열사는 늘어나 있다. 삼성 계열사는 2007년 59개에서 80개로 증가했다. 2002년 삼성의 계열사 수는 64개였고, 노무현 정부 말인 2007년까지는 오히려 59개까지 줄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 이후 4년 만에 21개사가 늘어난 것이다.
삼성뿐만 아니라 재계 2위인 현대자동차그룹은 36개에서 55개, 에스케이그룹은 64개에서 92개, 엘지그룹은 33개에서 61개, 롯데그룹은 44개에서 79개로 늘었다. 이런 식으로 자산 기준 상위 10대 재벌들의 계열사 수는 2007년 383개에서 630개로 늘었다. 무려 64%나 늘어난 것이다.
좀 더 범위를 확대해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토지주택공사와 한국전력공사 등 일부 거대 공기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재벌들로 구성. 2011년 말 현재 55개 기업집단)의 계열사 수를 보면 2008년 1069개에서 2011년 1621개로 늘었다. 그동안 재벌들의 계열사 확장 행태를 문어발로 표현해왔지만 이제는 지네발 수준까지 온 것이다.
이처럼 재벌 계열사가 급격히 늘어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노무현 정부 때 출자총액제한제(출총제)를 풀고 난 뒤 급기야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뒤 2009년 출자총액제한제를 폐지한 때문이다. 출총제는 재벌기업들이 상대적으로 적은 돈을 들여 마구잡이로 계열사를 늘려 여러 업종을 섭렵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였다.
재벌 총수 일가가 소수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고, 일감 몰아주기 등을 통해 편법으로 상속하는 것을 막는 장치로도 활용됐다. 거꾸로 이처럼 재벌 계열사들이 마구잡이로 늘어나면 중소기업이 발붙일 여지는 점점 줄게 된다.
이에 앞서 중소기업 보호와 육성 명목으로 1979년 도입돼 256개 업종이 지정됐던 중소기업 고유업종 제도도 2006년 폐지됐다. 두 제도의 폐지가 맞물리면서 재벌 계열사들은 전통적인 중소기업 업역까지 침범해 수익을 독점하고 중소기업들을 고사시켰다.
두부업계는 그 여파를 잘 보여준다. 2006년 두부 업종이 중소기업 고유업종에서 해제된 직후 당시 이미 대기업이던 풀무원 외에 CJ, 대상 등 재벌 기업의 진출이 본격화 됐다. 그 후 불과 5년 만에 4500억 원 규모의 두부시장에서 이들 3대 기업의 시장점유율이 절반을 넘어섰다. 같은 기간 절반의 시장에서 먹고살아야 하는 중소 두부가공업체들은 계속 문을 닫아야 했다.
그 결과 2006년 2300여 개에 이르던 두부가공업체들은 2011년 1580여 개로 급감해 700여개나 줄어들었다. 살아남은 업체들도 대부분 매출과 영업이익이 줄어들었다. 이런 식의 문어발식 확장이 지속되면 재벌의 배를 불리지만 중소기업이 숨 쉴 공간은 점점 줄게 된다. 중소기업이 줄어든 만큼 일자리도 사라지고, 중소기업의 매출과 영업이익이 줄어든 만큼 임금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중소업체에 주문생산하고, 자체 인력도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고용하는 재벌기업들이 빈자리를 메워준 것도 아니다.
사실 두부업계만 이런 것이 아니다. 노영민 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재생타이어, 장류, 국수, 양말, 쇠못, 아스콘, 골판지상자, 아연말, 리드와이어, 플러그 부착 코드제조업 등 재벌기업들이 펼치기에는 정말 좀스러운 수준의 사업까지 파고든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출총제와 중기 고유업종 제도의 폐지는 2000년대 이후 경영 전면에 나선 재벌가 3, 4세들의 사업거리를 확보해주고 경영권 세습을 정당화해주기 위한 재벌들의 로비가 작용한 측면이 크다. 그렇게 해서 재벌 3, 4세들이 '가만히 앉아서 돈 먹기'식의 사업 확장과 진출이 잇따르고 있다. 이를 통해 21세기 대명천지에 중세 봉건왕조나 북한의 세습체제와 맞먹는 재벌 세습체제를 지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