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교육청이 학생인권조례를 공포한 26일 오후 학생인권조례를 발의한 시민단체 활동가와 자문위원, 교육청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시교육청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권우성
최근 학교 폭력에 대한 걱정으로 온 나라가 연일 들끓고 있다. 실제로 최근 언론 보도에서 접하는 학교 폭력의 실태를 보면 이런 걱정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40대인 내가 겪어온 지난 학창시절을 생각해보면 '학교 폭력'은 그리 낯선 단어가 아니다. 고등학생이었던 1980년대에도 '왕따'라는 단어만 쓰지 않았을 뿐 내용에서는 차이가 없는 '따돌림'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또한 힘이 약한 아이를 힘 센 아이들이 패를 지어 괴롭히거나 때리는 사례 역시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아니, 보다 솔직하게 말하면 지금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학교 폭력의 사례는 사실 내 입장에서는 충격적이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좀 어색하다고 고백하고 싶다.
'패륜적인' 요즘 학생, 모든 게 다 진보교육감 탓?예를 들어보자. 만약 지금 어느 학교에서 수업중인 선생님의 등에 한 학생이 칼을 꽂아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이 사건에 대해 언론은 어떻게 보도할까. 아마 온갖 단어를 사용하며 이 패륜적 사건에 대해 개탄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내가 고등학교에 재학하던 1980년대 중반경, 서울 강동구의 모 고등학교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이었다. 선생님의 체벌에 앙심을 품은 범죄였다.
그 뿐인가. 같은 중학교 출신으로 함께 고등학교로 진학한 내 친구의 사건 역시 잊혀지지 않는 기억중 하나이다. 그는 전교생이 지켜보는 운동장 한 가운데에서 자신의 담임 교사에게 머리 크기만한 돌을 조준해서 던졌다. 다행히 돌이 비켜갔지만 제대로 맞았다면 큰 불상사가 예상되는 일이었다. 물론 그 후 친구는 퇴학당했다.
지금까지 열거한 사례는 모두 내가 직접 듣거나 본 사실이다. 더 열거하기가 민망할 정도의 사례 역시 풍부하다. 가령 교실에서 흡연하기, 거울로 여 선생님 치마 비춰보기 등은 해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그 당시 고등학교에서 있었던 흔한 모습이었다. 더하면 더했을 그 행동들을 생각해보면 낯 부끄럽고 지금에 와서는 왜 그랬나 싶은 후회만 남을 뿐이다. 아마 이런 사례가 지금 언론에 보도된다면 교실 붕괴 등의 표현 외에 달리 쓸 말도 없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가. 최근 보도되고 있는 사례가 새삼스럽게 놀랍지 않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이같은 학생의 일탈 내지는 학교 폭력의 문제가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한 소위 '진보 교육감' 때문이라며 공격의 날을 세운다. 최소한의 체벌조차 허용하지 않는 학생인권조례로 인해 교사들이 문제 학생을 지도할 수 없게 되었고 이로 인해 교권이 유린되고 있다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특히 지난 26일, 학생인권조례 공포를 반대하는 교과부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서울시교육청이 이를 강행하자 비난의 목소리는 더욱 가열되는 양상이다. 그들의 주장을 보면 학생인권조례로 인해 학교 현장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다. 예를 들어 "학생이 머리 염색하고 다녀도 되고, 여학생이 임신 출산을 해도 되고, 교내 시위를 해도 되고, 그렇지 않아도 개판인데 아예 대놓고 개판되라고 조장을 하고 있네!"라는 등의 비난 댓글을 쓰고 있다.
체벌 난무했던 1980년대... '학교 폭력' 때려서 해결되지 않아
그렇다면 정말 묻고 싶다. 앞서 예로 들었던 저 대한민국의 1980년대 중반, 서울의 모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사례는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교사들이 '제대로' 때리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라는 말은 하지 말자. 적어도 그 당시 체벌은 '교육적'이라는 단어가 어색할만큼 가혹했다.
특히 학생들이 회비처럼 걷은 학급비 중 상당액은 대걸레를 새로 사는 데 소요되었다. 성질 급한 담임 선생님은 반 아이들을 체벌할 때마다 대걸레를 찾았고 그것을 발로 분질러 몽둥이로 마구 때리곤 했다. 몽둥이하면 가장 많이 떠오르는 기억은 중학교 재학 당시 우씨 성을 가진 선생님이다. 그분은 지름이 약 15cm 정도 되는 절구 공이만한 박달나무를 체벌 도구로 썼다. 9번 니스칠을 했다는 그 몽둥이는 윤기가 번쩍번쩍 흘렀다. 공포스러운 윤기였다.
당시 30대 초반의 미혼이었던 그 선생님은 학생을 엎드려 뻗치게 한 후 넘치는 기운으로 그 묵직하고 단단한 몽둥이로 사정없이 내려쳤다. 맞으면 아프기보다는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렇게 10여 대 가량을 맞으면 고통은 그 다음날부터 시작됐다. 일단 엉덩이부터 다리까지 보랏빛으로 변했다. 그리고 의자에 앉을 때마다 전해오는 고통은 근 일주일가량 난처하게 만들곤 했다.
그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체벌은 그 몽둥이로 머리를 맞는 일이었다. 묵직한 중량의 그 몽둥이를 머리에 맞춘 후 공중에서 떨어뜨리면 강타당한 머리에서는 이상한 울림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얼마나 싫었는지 3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당시 선생님은 그 공포의 몽둥이에 '정신봉'이라는 글을 새겨 놓으며 애지중지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다. '학생인권조례'로 인해 문제 학생들을 때릴 수 없어 학교 폭력이 난무한다는 주장은 하지 말자. 때려서 해결될 것 같으면 아예 일제시대처럼 교사가 칼을 차고 수업을 하든가 아니면 은퇴한 K-1 격투기 선수를 교사로 특채하면 되겠다. 하지만 이것이 방법이 아님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해볼 수 있는 방법은 다 했다"는 말도 하지 말자. 적어도 내가 보기에 제대로 된 교육적 해법을 시도한 적도 없는 것 같다.
궁금한 것은 지금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 중 정말 이 조례를 읽어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점이다. 조례를 반대하는 이들이 가장 대표적으로 비판하는 '동성애' 관련 조항만 봐도 그렇다. 이들은 조례 제정으로 인해 학생들이 동성애자가 될 것이라며 교육청 앞에 대형 현수막을 걸어놓고 있다. 하지만 조례를 한 번만 제대로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억지인지 알 수 있다.
이들이 문제 삼는 내용은 학생인권조례 제5조 1항 '차별받지 않을 권리'에 기술되어 있다.
"학생은 성별, 종교,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지역, 출신국가, 출신민족, 언어, 장애, 용모 등 신체조건, 임신 또는 출산, 가족형태 또는 가족상황, 인종, 경제적 지위, 피부색,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병력, 징계, 성적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도대체 여기 어디에 그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동성애 조장 내용이 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조례는 다만, 이미 형성된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으로 인해 차별받지 않을 권리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문명국가이며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며 오히려 이를 두고 논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기록으로 남을 뿐이다.
유엔도 결의한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 차별 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