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옥수강궁을 품고 있었던 창경궁. 지붕 위에 지붕이 있는 것이 시사하는 바가 예사롭지 않다.
이정근
칼을 뺏으면 질러야지, 천추의 한을 남기다
이튿날, 상왕의 처소 수강궁에서 사신을 위한 잔치가 벌어졌다. 상왕이 사신을 초치(안으로 불러들임)한 모양새다.
"운검은 들이지 말라 했다."칼을 차고 들어가려는 성승을 한명회가 제지했다.
"나는 그런 소리를 듣지 못했소.""그래도 들어갈 수 없다.""나는 도총관으로서 운검이 내 책무요."성승과 한명회의 눈이 부딪혔다. 불꽃이 튀었다.
"무장한 무관은 들이지 말라 했다 하지 않았소이까?"한명회가 뱁새눈처럼 작은 눈으로 성승을 쏘아보았다.
"명에 죽고 사는 것이 무관이오. 어디서 나온 명이요?" "어명이요."성승이 물러났다. 통수권자 임금의 명령이라는데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어휴! 저놈을 그냥...""세자가 오지 않았으니 한명회를 죽여도 소용이 없습니다." 성승이 칼을 빼어들고 한명회에게 달려가려 하자 성삼문이 만류했다.
"지금 당장 요절을 내버립시다."유응부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 세자가 본궁에 있고 운검을 들이지 말라 하였으니 이는 하늘의 뜻인 것 같습니다." 박팽년과 성삼문이 냉정을 되찾자고 호소했다.
"여기에 와 있는 수양과 그 졸개들을 죽이고 상왕을 모시고 경복궁으로 쳐들어가면 세자가 감히 대항하겠습니까? 좀처럼 만나기 힘든 기회이니 놓쳐서는 안 됩니다."유응부가 강공을 주장했다.
"만일 거사하였다가 세자가 경복궁에서 군사를 일으켜 반격하면 성공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임금과 세자가 같이 있는 날을 잡아 거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일은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이 중요한데 후일로 미루면 비밀이 누설될까 두렵소.""무모한 공격은 만전지계(萬全之計)가 아닙니다."오늘 결행하자는 유응부의 주장을 박팽년과 성삼문이 한사코 만류했다. 만전(萬全). 참 좋은 낱말이다. '돌다리도 두들겨 가렸다'고 완벽하면 더할 나위없다. 하지만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고 너무 신중한 것이 화(禍)를 부르고 천추의 한이 된다는 것을 성삼문도 이때는 몰랐다.
문밖에서 유응부를 제지한 성삼문이 수강궁 안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머리를 감고 있는 신숙주를 발견한 윤영손이 칼을 빼려하자 성삼문이 눈짓으로 만류했다. 영문을 모른 윤영손이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