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는 좌우균형을 이루면서 나아간다. 자전거포를 운영했던 라이트형제는 자전거 균형원리를 잘 탐구해 비행기를 날게 하는데 성공한다.
창공으로(2006)
라이트형제는 교회신문을 발행하는 아버지 영향을 받아 1889년 4면짜리 주간지를 발행했다. 엄연한 상업지였으나 다른 일간지들과 경쟁에서 이길 수가 없었다. 이내 신문발행을 그만 둔 형제들은 인쇄업을 하면서 종종 친구들 자전거를 고쳐주곤 했다. 자전거 타기를 무척 좋아하던 형제는 곧 동네 사람들로부터 '솜씨 좋은 자전거 수리공'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그 무렵 미국에선 자전거 바람이 불고 있었다. 언론은 자전거 열풍이라고 표현했다. 시대 흐름에 맞춰 1892년 형제는 인쇄소 대신 자전거 상회를 열었다. 장사는 두 사람 실력에 힘입어 네 군데나 가게를 둘 정도로 번성했다. 처음에 단순히 자전거만 고쳐주던 형제는 자전거를 직접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형제는 부품을 직접 만들어 팔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다. 헌 자전거가 라이트형제 가게에만 들어갔다 나오면 근사한 자전거로 바뀌어 나왔다.
형제는 1903년 세계에서 최초로 비행을 했으며, 1905년에는 최초로 실용적인 비행기를 만들어 하늘을 날았다. 형제는 비행기가 뜨기 위해서는 균형이 필수라는 점을 깨달았고, 좌우균형을 맞춰 나아가는 자전거를 주목해 결국 비행기를 띄우는데 성공했다.
비행기 뿐만 아니다. 자전거에 엔진을 달거나 뚜껑을 씌우는 형태로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만들어졌다. 즉 인간동력으로 움직이는 건 자전거, 기계동력으로 움직이는 건 자동차나 오토바이였다.
자동차용 가솔린 내연기관은 1883년 독일 다임러(Gottlieb W.Daimler)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 엔진은 1885년 자전거에 달려 세계 최초의 오토바이로 이어졌다.
1886년 세계 최초로 자동차 특허증을 받은 벤츠 자동차엔 자전거용 핸들이 달려 있었다. 다임러사와 벤츠사는 1926년 합병하면서 메르세데스 벤츠로 이름을 바꾸었다.(참고 :
메르세데스 벤츠 박물관)
혼다 창업자인 혼다 소이치로는 자전거포 점원 출신이다. 혼다는 자전거에 엔진을 단 자전거로 오랫동안 인기를 끌었다. 1937년 피스톤링(Piston rings)을 생산하면서 사업을 시작한 혼다는 하마마스에 있는 작은 공장에서 자전거에 50cc 2기통 엔진을 달아 드림(Dream, 1948)을 만들어 냈다.
초창기 여러 발명가들은 자전거를 통해 영감을 얻고, 사업가들은 자전거를 통해 새로운 수익모델을 찾았다.
조선 또한 이 흐름에 동참했으니 자전거 기술자들이 맹활약한다. 최덕윤은 무연탄 연소기를 발명한다.(1925년) 당시 조선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쓰던 연료는 나무였다. 나무를 베어 밥을 하고 물을 끓였으니 나무가 남아날 새가 없었다. 곳곳이 민둥산으로 변했고, 여름이면 산에서 흙이 줄줄 흘러내렸다. 무연탄 연소기는 조선 연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겨져 주목을 받았다. 최덕윤의 직업은 자전거수리업자였다.
1931년엔 자전거포를 하는 박봉춘이 솜타는 기계인 타면기(=솜틀기)를 만들었다. 당시는 기적의 섬유라 불리던 나일론(1935년 발명)이 나오기 전이다. 박봉춘이 만든 타면기는 기존 제품보다 능률이 1.5배 정도 앞섰고 사용시 소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앉아서 할 수 있고 두 명이 쓸 수 있어 이점이 많았다. 타면기는 바퀴를 돌리는 형태로 페달을 돌려 바퀴를 돌리는 자전거와 비슷하다. 자전거 구조에 능통한 박봉춘은 타면기를 만드는 데 꽤 유리했다.
1934년 홍성유는 자전거 부품을 이용해 송풍기(送風機)를 만들었다. 프로펠러 가운데 심 부분을 자전거 휠을 이용해 만들었다. 한 바퀴를 돌린 뒤 손을 놓아도 계속 돌아가는 방식. 자전거 페달을 몇 번 돌리다 멈춰도 가속력 때문에 계속 돌아가는 원리를 응용했다.
이처럼 자전거 작동방식은 각종 생활용품에 스며들었다.
자전거 쪽에서도 새로운 기술들이 속속 나왔다. 1932년 나온 공기안장이 대표적. 지금도 그렇지만 줄곧 자전거 안장용 완충장치는 용수철이었다. 발명자는 용수철 대신 공기튜브로 바꿔 제작비용을 줄이면서 완충효과를 높였다. 이후 공기튜브안장이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아마 다른 결함이 발견됐거나 기존 자전거업계가 이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1934년 나온 자전거용 짐받이는 독특했다. 당시는 자전거가 화물용으로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짐을 많이 싣고 다녔다. 문제는 도난 문제. 자전거 뒤에 실린 짐만 들고 튀는 도둑들이 많았다. 발명자는 짐받이에 열쇠를 달아 잠그게 만들었다.
같은 해 김진성이 만든 신식 자전거는 지금 봐도 놀라운 기술을 달았다. 펌프를 몸통에 넣어 언제든지 바람을 넣을 수 있게 했고, 타이어는 펑크를 막을 수 있게 특수 제작했다. 속력 또한 기존 자전거의 2배 이상으로 높였다.
자전거 발명붐 가운데 사기사건도 벌어졌다. 이른바 박평신의 수상자전거(水上自轉車) 발명 사건.(1940년) 박이 특허등록 후 부자가 되면 이익을 나누자면서 돈을 받은 것. 물론 이 자전거는 거짓이었고 돈을 받은 뒤 발명가는 사라졌다. 만약 이 발명이 사실이었다면 대박가능성은 있었다. 당시 한강에 다리라곤 한강철교와 한강인도교, 광진교 셋 뿐이었고, 그나마 한강철교는 사람이 다닐 수 없었다. 대부분 지역에서 강을 건너려면 배를 타야 했고 그마저 끊어지기 일쑤였다. 수상자전거가 있으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으니 어쨌든 박은 시대 요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