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사능 피폭과 관련해 어느 초등학생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 또 어느 여고생은 "결혼할 수 있을까요?"라고 두려움에 떨며 호소한다. 시간이 흐르면 누구나 당연히 경험하는 일조차 의심해야 하는 왜곡된 현상이 후쿠시마 원전사고 후에 늘어나고 있다.
사고 후 1년이 흘러도 15만여 명의 피해지역 주민들은 여전히 피난생활을 강요당하고 있으며 이혼, 우울증, 가정폭력 등도 증가하는 추세다. 최근 자료에 따르면 후쿠시마 현 양로시설의 고령자 사망률이 2011년에는 예년의 2배나 된다. 이처럼 원전사고의 피해는 어린이, 여성, 노인 같은 사회적·신체적 약자에게 집중되는 구조를 보인다. 낙후된 지역에 원전이 세워지는 점에서도 그러한 차별 구조를 볼 수 있다.
에너지의 과소비를 마치 부의 증명서처럼 생각하는 물질문명 범람은 스스로 목을 죄는 멍에가 될 뿐 아니라 다음 세대의 꿈조차 짓밟아버리고 있다. 기껏해야 전기생산기계에 불과한 원전 때문에 주민들은 추억이 담긴 고향이라는 '과거', 일상의 삶이 담긴 '현재',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미래', 이 세가지 모두를 잃고 말았다. 원전사고의 발생을 '판도라의 상자'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으나 피해주민들은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참담한 처지에 놓여 있다. 언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고, 또 돌아가더라도 일생 동안 방사능 피폭이 기다리는 진퇴양난의 상황인 것이다. 어느 철학자가 말하듯이 '죽음에 이르는 병' 즉 절망을 가까이하기 쉬운 분위기다.
시대를 역행하는 원전확대 정책
이런 상황에도 일본정부는 가동 정지중인 원전의 재가동에 혈안이 되어 있고, 한국에서도 에너지낭비의 중독을 부채질하듯이 원전 확대만 주장하고 있다. 한편, 일본은 50여년간 계속 추진해왔던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 및 고속(증식)로 등의 개발을 핵심으로 하는 핵연료주기정책의 전환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원자력 클러스터라는 미명으로 경상북도의 일부 지역에 핵연료주기시설의 건설을 강행하려 한다. 또 원전의 해외수출을 성장산업의 주력으로 정하여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정부의 판단이 과연 국민의 이익에 일치하는 것인지 의문을 지울 수 없다. 한마디로 단락적이며 근시안적인 판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시설들은 원전보다도 사고 발생의 리스크가 높고, 또 그 피해도 훨씬 막대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설들에 경제성이 없다는 점은 재론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안전공학 이론에는 자칫하면 사고가 났을 뻔한 경우가 300건, 그리고 작은 사고 29건이 일어난 후에는 대형사고가 발생한다는 '하인리히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재처리공장 및 고속로에서는 이미 사고가 충분히 발생했고, 선두주자였던 미국조차 오래전에 개발을 포기한 상태다. 하지만 한국정부는 이런 시설들의 안전성을 강조하기 위해 국내 원전을 오랫동안 안전하게 운전해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랫동안'도 겨우 32년 정도로 '영원'이 아니며, 또 '안전하다'도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를 의미할 뿐이다.
근거 없는 낙관론이 대형 참사를 만든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직후 한국의 원자력 마피아는 국내 원자로가 일본과는 다른 것이므로 우리는 안전하다는,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낙관론을 펴왔다. 1979년에 발생한 미국의 스리마일아일랜드(Three Miles Island) 원전사고는 한국 원전과 같은 가압수형원자로(PWR)에서 발생한 것인데, 당시 일본의 토오꾜오전력은 자사의 원전이 비등수형원자로(BWR)이므로 안전한다고 선전했고 심지어 기업 30년사에도 이런 내용을 기록한 바 있다.
절대적인 안전우위론만 강변하면서 안전성의 제고는 소홀히 한 채 오로지 경제적 효율성만 추구한 것이 작년의 참사를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인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비참한 원전사고가 발생했다고 해서 한국 원전의 안전설비 및 기술이 일본보다 높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독일의 탈원전 움직임도 세계 최고의 안전성을 자랑하던 일본 원전에서 사고가 발생했다는 충격이 크게 작용했다.
정부는 원전 확대를 일방적으로 주장할 것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긴급 과제가 무엇인지 인식하고 또 행동으로 보여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동시에 국민도 에너지 절약에 동참하는 것이 불가결한데, 만약 이것이 실천된다면 가치관의 전환 또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형성 같은 거창한 언설도 필요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후손이 쾌적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살아갈 권리를 현재의 우리가 마음대로 뺏을 수 있는가 하는 소박한 자문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더욱 바람직할 것이다.
우리가 상상력의 범위를 좀더 넓히고 시간의 벽을 넘어 내다본다면 명쾌한 답이 나올 것으로 짐작된다.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타인 또는 후손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인간의 참된 '이성'을 찾도록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성의 회복이야말로 원전사고로 멈춘 시간을 돌려 새로운 문명의 형성을 위해 내딛는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창비주간논평입니다. 장정욱 기자는 일본 마쓰야마(松山)대학 경제학부 교수입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