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 직후 군산 시가지 모습(출처: 군산시청)
조종안
군산이 근대적인 도시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개항(1899) 이후로 알려진다. 그러나 천혜의 양항이었던 군산은 중국, 일본 등과 교역이 이루어져 개항 전에도 상당수 일인과 중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1905년 군산항을 근대항으로 건설하기 위해 거액의 공사비(8만6천 원)를 투입하지만, 그해(1905) 11월의 을사늑약으로 의미가 퇴색된다.
러일전쟁(1905)이 일제의 승리로 끝나자 일본인 진출이 급격히 팽창했다. 또한, 식민통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경술국치(1910) 이후에는 각종 제도가 일제의 의도대로 정비되고 일인들의 합법적 활동이 확대되면서 관청은 물론 주요 상권까지 일제의 손으로 넘어간다.
군산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토지와 운송, 금융 등을 자신들의 의지로 전단하며 군산 일대 농민들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또한, 명치정(明治町), 소화통(昭和通), 장기(長崎), 능본(熊本) 등에서 알 수 있듯 자신들이 섬기는 왕과 고향 이름을 학교, 거리, 기관 이름에 붙여졌다. 민족 말살을 위해 미나미(南次郞) 총독이 1937년에 내세웠던 내선일체(內鮮一體)가 이미 시작됐던 것.
호남평야의 기름진 쌀에 입맛을 다시던 일제의 '약탈형' 거점항구가 된 군산은 그들의 계획대로 도시가 하루가 다르게 확장되었다. 싼값에 농지를 사들이고, 쌀을 수탈하기 위한 축항공사와 간척공사가 순조롭게 이루어지면서 일본인 이주 급증으로 1930년대에는 전북 도청소재지 전주 인구를 추월하는 전국 7대 도시로 급성장한다.
"주목할 것은 1919년 3·1 만세운동이 한강 이남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곳이 군산(3월 5일)이고, 전국에서 가장 많은 소작쟁의(1920년대)가 일어난 곳도 군산이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일어났던 쟁의는 수탈과 수모를 당하던 조선 백성들 가슴 깊이 억눌려 있던 분노의 표출이었지요. 또 하나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군산이 번영을 누리고 일인들이 부(富)를 쌓을수록 조선인들의 삶은 더욱 각박해지고 피폐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어쨌든 군산은 1930년대까지 성장하다가 1940년대 들어 멈춥니다.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시작된 중일전쟁(1937년 7월)에 이어 태평양 전쟁(1941~1945) 때문이었지요. 군산은 그렇게 건설이 중단된 상태에서 해방을 맞이합니다. 해방 이후 북한, 중국과 교역이 단절되자 잠시 큰 혼란에 빠졌으나 원조물자 등 수입 선박의 출입으로 부두 노동자들이 생계를 유지하면서 임해상공업도시 위치를 겨우 유지하지요." 김 교수는 "군산은 정치, 경제, 사회적인 여건 변화로 낙후된 지역으로 전락, 반세기 가까이 '성장이 멈춘 도시', '불 꺼진 항구'라는 불명예스러운 소리를 들어야 했다"며 "1960년대 이후 군사정부가 추진한 서울-대구-부산 중심의 '절름발이 경제개발' 영향이 가장 크다"고 지적했다.
채만식은 불합리한 세태 거부했던 신념 있는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