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 사찰은 민주주의를 망친다

[헌법 제17조 바로 보기]

등록 2012.04.07 18:13수정 2012.04.07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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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대한민국 정치의 틀이 민주주의임을 상기시킬 때 주로 인용하는 말이 헌법 제1조 2항의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문구다. 하지만 헌법 1조2항은 "공직자는 정직해야 한다"는 말이나 다름없는 원론적이고 선언적인 조문일 뿐이고, 실제로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것은 헌법 17조라고 생각한다.

제17조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유교적이고 집단적 사고에 익숙한 한국인들에게 '사생활'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그리 좋지 못하다. 왠지 뭔가 비밀스럽고 못된 짓을 남몰래 하는 생활을 일컫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국민은 서구인들과 달리 '사생활 침해'라는 사안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의외로 많은 성인이 자신이 떳떳하면 사생활이 공개된들 어떠냐는 식의 사고를 하고 있다.

하지만 사생활 비밀을 보호한다는 것은 단순한 개인의 윤리적 차원이나 인권의 차원을 넘어서서 국가권력의 구조를 결정짓는 중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누군가 이유 없이 비굴하게 굴 때 흔히 '약점 잡혔다'고 말한다. 그렇다. 사생활이 노출된다는 건 약점을 잡힌다는 말이다. 바꿔 말하면 권력자가 국민의 사생활을 알 수 있다면 국민을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이다.

2011년 벌어졌던 기무사 해킹 사건을 기억하시는가. 기무사 소속 군인들이 한 교수의 컴퓨터에 스파이웨어를 침투시켜 개인 정보를 빼냈던 일이 있었다. 기무사 군인들은 보안유지를 위해 PC방에서 이메일로 스파이웨어를 보냈다. 으스스하지 않은가. 우리가 하루 동안 온라인에 쓴 글들이 얼마나 많은지, 또 내 PC에는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파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면 우리가 권력에 약점 잡히고 유린당할 일은 얼마든지 있다고 할 수 있다.

a 워터게이트 사건은 미국의 정치지형을 바꿨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의 한 장면. 워싱턴포스트 지의 기자 칼 번스타인(더스틴 호프만)과 밥 우드워드(로버트 레드포드)가 기사내용을 논의하고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미국의 정치지형을 바꿨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의 한 장면. 워싱턴포스트 지의 기자 칼 번스타인(더스틴 호프만)과 밥 우드워드(로버트 레드포드)가 기사내용을 논의하고 있다. ⓒ 영화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따라서 헌법 1조를 17조의 관점에서 바꿔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의 비밀 유지에서 나온다.


2차 대전에서 독일이 연합군에 진 이유 중 하나가 정보전에서 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국의 천재 수학자가 암호작성기계인 '이니그마'를 해독했던 것이다. 비밀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 비밀은 곧 권력이다. 영업비밀이 유출되면 회사가 망하고, 군사기밀이 누출되면 전쟁에 패하고, 국민의 비밀이 새어나가면 민주주의가 망하는 것이다.

민간인 사찰은 권력자가 국민을 상대로 벌이는 정보전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지만, 상황은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언론은 어김없이 이번에도 정치인 말실수로 메인뉴스를 도배하며 사찰뉴스를 물타기 중이고, 검찰의 수사의지는 약해 보이고, 결정적 순간마다 몸을 사리는 사법부도 미덥지 못하다. 그리고 대중의 반응은 미적지근하다. 이번에 승기를 잡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희망이 없는 데도 말이다.


민간인 사찰은 보수와 진보, 여당과 야당이라는 단순한 프레임에 가둘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자유'라는 보수의 근본가치를 훼손했기에 사실 보수진영이 더욱 크게 분노해야 할 일이다. '자유'를 지키지 못하는 보수는 파시즘일 뿐이다.

민간인 사찰이 얼마나 심각한 사안인지 가늠하려면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돌아보면 된다. 야당 사무실 도청 미수라는 우리가 보기에는 별것도 아닌 사건이었지만 대통령을 비롯한 핵심 권력자들이 모두 쫓겨나고 공화당은 20년 동안 집권하지 못했다. 미국 시민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하는 세력에게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했던 것이다.
#민간인사찰 #사찰 #워터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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