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때 딸아이는 참 엉뚱한 아이였습니다.
신광태
"아빠 계시니?"
딸아이가 네 살 때 사무실 직원이 집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안 계시는데요." "그럼 엄마는 계시니?" "안 계시는데요." "그럼 어린 너 혼자 집에 있는 거냐? 너 참 착한 아이로구나! 엄마는 어디 가셨는데?" "베란다요."어느 날 직원이 내게 전달할 사항이 있어서 집으로 전화를 했을 때 딸아이와 나눈 통화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오랫동안 사무실 직원들 사이에서 회자 되었었습니다. 녀석은 자기 옆에 엄마가 없으니까 없다고 한 것인데, 직원들은 딸아이를 수준 높은 센스쟁이로 평가했습니다.
녀석이 다섯 살 되던 어느 날 일요일, 받고 싶지 않은 전화가 있어서 집사람에게 누구에게서 전화가 오던지 나 없다고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새눈을 뜨고 보니 집사람은 빨래를 널기 위해 밖으로 나갔는지 없고, 딸아이가 전화기를 향해 후다닥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전화 받지 마"라고 말하기도 전에 녀석은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제발(술 마시러 나오라는) 친구 녀석의 전화가 아니길...'이란 생각도 하기 전에 딸 아이는 큰소리로 내게 말했습니다.
"아빠 찾는 전화인데, 없다고 그럴까?"녀석은 나름대로 아빠를 생각해서 말한 건데, 그렇게 말하려면 수화기나 막고 말할 것이지. 하는 수 없이 전화를 건네받았습니다. "자식아! 넌 애들 교육을 그렇게 시키냐?"라는 친구의 핀잔에 "너 때문에 받지 않으려고 했다 인마!"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오랜만에 낮잠 좀 자려고 그랬다, 미안해"라고 말하자 "빨리 기어나와! 한잔하자"는 친구의 답이 돌아옵니다. 딸 아이 덕분에 그날 또 고주망태가 돼 집에 돌아왔습니다.
이모와 고모를 죽인 우리 딸"큰일 치르시느라 힘드셨겠어요. 힘내세요!" 딸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인 어느 날, 집사람은 딸아이의 친구 엄마로부터 이상한 말을 들었습니다.
"아니 큰일이라니, 뭘 말씀 하시는 거죠?" "얼마 전에 영은이 이모(집사람의 언니)가 돌아가셨다고 하던데..." 집사람은 얼마 전 오전 11시쯤 집으로 돌아온 딸아이를 기억해 냈습니다. 분명히 그날 딸아이는 "선생님이 일찍 보내줬어"라고 말했는데, 일찍 집에 가야 할 구실을 생각하던 녀석이 '이모님이 돌아가셨다'는 핑계를 댄 겁니다. 녀석은 참 기특하게도 존재하지도 않은 큰 이모를 죽인 겁니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1년 뒤, 자율학습이 싫었던 녀석은 또 고모를 죽였습니다. 역시 내게 여동생이나 누님이 없기 때문에 녀석에게 고모는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죽였습니다.
"인마! 여기 좀 앉아 볼래? 우리 약속 하나하자. 아빠도 살면서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을 테니, 너도 이제 거짓말하지 않기로 약속해 줄래?" 이 같은 서로의 약속 때문인지, 녀석은 그 이후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대신 뻔뻔스러울 만큼 대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빠 우리 만날까?" 어느 날 퇴근시간 무렵 사무실로 걸려온 딸아이의 전화. 밖에서 딸아이를 만난다는 것. 연애할 때 기분처럼 설렜습니다. '녀석을 만나서 좋아하는 돈가스 시켜놓고 공부하는데 어려움은 없는지, 아빠에게 불만은 없는지 등에 대해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약속장소로 나갔습니다. 멀리서 녀석이 손을 흔들며 달려옵니다.
그러고는 하는 말이 "아빠 실은 나 오늘 수학 빵점 받았어. 절대로 엄마한테 말하면 안 돼! 나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간다. 집에서 봐~"이었습니다. 솜방망이로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기분, 녀석은 빵점 받은 사실을 내게 말함으로써 스스로 부담을 털어버리려 했나 봅니다.
어머님의 말씀, 50살이 된 지금에야 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