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건축학개론>의 한 장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수단으로서의 삐삐. 그러나 대학교에 올라와 처음 가지고 다닌 삐삐가 늘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난 삐삐를 가지고 다님으로써 생전 처음 구속감을 맛봐야 했으며, 내가 지금 삐삐라는 문명의 이기에 너무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자괴감을 느껴야 했다. 뉴 메시지가 울리기를 바라는 한심스러운 나의 모습.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삐삐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바로 삐삐의 음성녹음 기능 때문이었다. 10개 정도로 발신자의 목소리를 남길 수 있는 삐삐의 기능. 그것은 특히 처음 사랑을 시작하고자 하는 내게 최고의 기능이었다. 편지지 대신 수화기에, 연필 대신 나의 목소리로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 삐삐.
대학교 2학년 어느 날. 그날도 난 친구들과 함께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필름이 중간 중간 끊겨 그 다음날 아침에 생각나는 거라곤 귀가 중 어느 공중전화 박스에서 누군가에게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해서 남겼다는 사실. 누구한테 전화를 걸었지? 삐삐를 친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한 거지? 실수를 한 건 아닐까?
그렇게 쓰라린 배를 움켜쥐고 해장을 하며 머리를 썩이고 있는데 저 멀리서 평소 호감을 가지고 있던 여자 후배가 내게로 걸어왔다. 캠퍼스의 봄, 그녀의 새내기 시절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차마 좋아한다고 고백하지 못했던 그녀였다.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네는데, 갑자기 그녀가 빙긋이 웃으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선배, 잘 들었어요." "응? 뭘?""음성 메시지요. 제가 5개를 장기 저장해서 5개까지 밖에 녹음 못 하셨더라고요.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오늘은 10개 다 비워둘게요.""…" 순간 얼굴은 빨개졌고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 결국 내가 전화 걸었던 이가 그녀의 삐삐였으며, 난 그녀의 음성 메시지 함에 술에 취한 채 취중진담을 하고, 녹음이 끊기면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그랬던 것인가.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고백 아닌 고백을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당시에는 부끄러웠지만 그 결과 후배와 나의 사이는 더욱 가까워졌다. 내가 군대를 가고 하는 바람에 사귈 시간은 없었지만, 어쨌든 난 그렇게 얼떨결에 그녀에게 고백했으며, 그녀는 그런 나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삐삐의 음성사서함 덕에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것이다.
비록 나의 경험을 예로 들었지만, 당시 삐삐의 음성사서함 기능은 실로 획기적이었다. 그것은 마치 쓰다 만 편지지의 느낌이었다. 밤새 우수에 젖은 감성으로 녹음했다 지우고, 녹음했다 지우고. 혹여 기다리던 이의 목소리가 삐삐를 통해 들릴 때면 그날은 너무 설레 잠도 자지 못할 지경이었다. 전화해서 무한 반복 듣기.
이런 삐삐에 대한 달콤한 추억 때문일까? 난 99년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 처음 휴대폰이라는 것을 접했을 때 매우 부정적이었다. 삐삐는 시간차를 둠으로써 음성을 남긴 이나 기다리는 이 모두 설레는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휴대폰은 바로 통화함으로써 그와 같은 설렘을 애초부터 불가능하게 한 것이다. 삐삐보다 편하기야 하지만 왠지 삐삐보다 덜 낭만적이고 천박한 듯한 휴대폰.
제대 이후 휴대폰의 폭증과 함께 삐삐는 어느새 구식 물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삐삐를 생각하면 가슴이 설렌다. 그때 그 시절 추억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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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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