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그린 삽화. 어머니의 '거짓말'이 그립다.
이하영
내가 11살이었을 때였다. 부쩍 '밤마실'이 잦아지자 엄마는 '뻐꾹산 여우' 이야기로 겁을 줘서 내 발을 붙들어 놓으려고 했다.
"영환이 아저씨 알지? 그 아저씨 예전에 뻐꾹산을 넘어가다가 하마터면 큰 변을 당할 뻔했단다. 눈이 하얗게 내린 밤에 뻐국산을 넘다가... 아, 글쎄 길을 잃어버렸다지 뭐니. 아무리 걸어도 그 길이 그 길 같더래, 그러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데, 갑자기 눈처럼 하얀 여우가 나타나서는..."만약 그때 정신을 잃었으면 분명 그 여우한테 잡아 먹혔을 텐데, 다행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서 변을 당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뻐꾹산은 내 고향 마을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산이다.
엄마는 "그 여우가 배가 고파지면 가끔 마을에도 내려오니 밤늦은 시간에는 절대 밖에 나가지 말라"며 이야기를 마쳤다. 정말 무서운 이야기였지만 효과는 별로였다. 그 무섭다던 하얀 여우도 내 발을 붙잡지 못했다. 난 무서움에 벌벌 떨면서도 '밤마실'을 계속 다녔다.
내가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밤마실'을 다닌 이유는 바로 텔레비전 때문이었다. 텔레비전이 주는 즐거움이 두려움을 이겼던 것. 친구들 집에는 텔레비전이 있었지만, 우리 집에는 없었다. 내 친구는 모두 세 명, 난 그 친구들 집을 사나흘 간격으로 번갈아 다니며 텔레비전을 봤다. 한 집만 계속 가면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언젠가 내가 텔레비전 때문에 상처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오밤중에 남의 집을 제집인 양 들락거리는 염치없는 꼬마를 한결같이 반겨 줄 어른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엄마의 예상대로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을 겪고야 말았다.
"야! 인마! 이제 그만 집에 가! 밤늦게 오지 좀 마라!" 제일 친하고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친구의 아버지가 역정을 냈다. 난 얼굴이 빨개져 도망치듯 뛰어 나왔다. 그 일이 있은 뒤 11살 꼬마의 거침없는 '밤마실'은 끝났다.
어느 날, '요즘은 왜 밤마실을 가지 않느냐'고 엄마가 물었다. 난 주저주저 하다가 그날 내가 겪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엄마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한참 동안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그날 밤, 엄마와 아버지가 다투는 소리를 잠결에 어렴풋이 들었다.
다음 날, 엄마는 "우리집에도 텔레비전이 들어오니 더 이상 밤마실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난 엄마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엄마 치마꼬리를 붙잡고 며칠을 매달려도 이뤄지지 않던 소원이 바로 텔레비전이었다. 그런데, 엄마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며칠 후 우리 집에 거짓말처럼 텔레비전이 들어왔다.
'거짓말쟁이'가 된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