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이들의 모의고사 점수를 표로 만들어 상담시 '닦달 자료'로 사용해 왔다
박은선
녀석은 이처럼 인문사회적 지식과 문제의식에 있어 '뛰어난 인재'였다. 당연히 녀석의 사회, 국사, 세계사 등의 점수는 늘 최고였다. 또 언어(국어)와 외국어(영어) 시험에서도 만점을 받거나 실수로 한 문제를 틀리거나 했다. 하지만 수학에 있어서는 달랐다. 모의고사 수학 점수가 1학년 때부터 줄기차게 40점대이니 현실적인 입시지도의 책임을 가진 나로서는 녀석에게 잔소리를 해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얼렀고 다음엔 혼찌검을 냈다. 어느 면담 시간엔 녀석이 제 수학 점수가 낮은 이유를 어찌나 체계적으로 설명하던지 깜빡 넘어갈 뻔 했다. 역시나 말 하나는 엄청나게 잘 하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닥치고 수학"을 외쳤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런데 그 면담 이후의 모의고사 성적표를 보고 나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 녀석의 수학점수는 30점대였다. 수학공부에 최선을 다한다더니, 걱정하지 말라더니! 다짜고짜 녀석을 불러내 얘기를 들어봤다. 그러자 녀석의 입에선 기절초풍할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솔직히 공부 못했습니다. 아니 안 했습니다. 제가 학생회장이기에 이번 축제와 관련해 신경써야 할 것이 많습니다. 또 우리 학교 교칙을 찾아보니 징계만이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초중등교육법을 모두 출력해 하나씩 대조하며 문제를 찾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학교 대표로서 해야 할 일이 적지 않아...""야!"나는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학생회장 좋다. 교칙에 대한 문제제기 좋다. 하지만 그런일 하느라고 안 그래도 바닥인 수학점수를 더 떨어뜨리는 게 말이 되냐, 추락하는 너의 수학 점수가 그렇게도 아름다워 보이더냐, 대학 갈 생각을 하긴 하는 거냐, 기타 등등 나는 아예 책상까지 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하지만 녀석은 반성의 기미는커녕 자신이 해야할 일인데 어쩔 수 없지 않느냐며 굽히질 않았다.
결국 나는 녀석을 협박해 억지로 '반성문'을 쓰게 한 뒤 녀석의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그리고 녀석의 낮은 수학점수와 관련해 긴급 면담을 요청드렸다.
부모님께서 의자에 앉자마자 나는 녀석의 모의고사 성적 분석표를 보여드렸다.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의 성적들을 그래프로 그려놓은 분석표였다.
"정말 일관성 있지 않나요? 언어와 외국어는 계속 최고에요. 그런데 수학이 이 모양이에요. 학기 초부터 수학만 올리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했고 알아들었다 생각했는데 이 녀석이 오히려 점수를 더 떨어뜨렸어요. 그게 세상에 학생회 일 때문이라고 하는데 저는 왜 저렇게 자기 점수 챙길 생각은 안 하고 저러고만 다니는지 화가 나 죽겠어요. 마침 여름방학이 다가오고 있으니 전 이 녀석이 방학 동안 학교 밖에서 수학 과외를 집중적으로 했으면 좋겠어요. 방학 때 수학만 제대로 잡으면 이 녀석 못 갈 대학이 없어요. 제발 좀 부탁드려요."나보다 나이 많은 학부모님들께 예의 없지는 않을까 걱정됐지만 그래도 두 분이 동의하실거라 믿었다. 하지만 어렵사리 말문을 연 아버님의 답변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선생님은 좋은 대학 나오셔서 행복하신가요? 아니, 좋은 대학 가면 행복하다고 생각하시나요?""네에?"내 두 눈이 동그래지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자 녀석의 어머님이 아버님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하지만 녀석의 굽힐 줄 모르는 성격은 아버님을 닮은 것이었나보다. 아버님은 말씀을 계속하셨다.
"저희 부부 모두 의대를 나왔고 또 의사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의대 나오고 의사를 해서 행복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좋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게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애는 꼭 좋은 대학 가겠다는 생각도 없고 역사를 연구하며 살거나 사진기 들고 세계 곳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거나 다큐 만들며 살고 싶다고도 합니다. 그렇게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게 행복 아닐까요? 집에 오면 학생회 얘기를 참 많이 합니다. 요즘은 축제 준비 때문에 저희가 보기에도 정신이 없고요. 그런 것도 다 나중에 다큐 만들고 이럴 때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수학 공부에 너무 연연하는 것보다..."아버님은 그 정도에서 말씀을 멈추셨다. 뒤늦게 내 생각에 동의하셔서가 아니라 어머님이 아까보다 더 강하게 옆구리를 치셨기 때문이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학생이면 일단 공부를 해야 하고, 얘가 지금 수학만 집중적으로 하면 얼마든지 좋은 대학 갈 수 있는데 저는 아버님 말씀이 이해가 안가요.""네 선생님. 저희가 잘 얘기할게요. 그리고 방학 때 수학 과외 시키는 거 고려하도록 할게요."아버님의 말문을 막고 어머님은 그렇게 얘기를 마무리 해주셨다. 어찌됐든 '수학과외'라는 나의 대안을 수용해주신 거였다. 그런데 두 분이 그렇게 면담을 마치고 교무실을 나가신 뒤 나는 텅빈 교무실에 늦도록 홀로 앉아 있었다. 무언가 많은 생각이 밀려오고 무언가 울컥거리는데 그게 뭔지 정체를 알 수 없어 그저 가만히 천장만 바라볼 뿐이었다.
여름방학 동안 녀석은 수학과외를 받았다. 매일같이 몇 시간씩 수학 과외를 받고 매일같이 그 과외지도에 대한 복습을 했다. 하지만 2학기에도 녀석의 수학점수는 기대와 달리 조금도 오르지 않았다. 이제 고3이 된 녀석이 가끔 카톡으로 안부를 물을 때에도 나에겐 늘 녀석의 수학점수가 최대 관심사이지만 역시 별반 변화가 없는 모양이다.
'오싹'...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