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청년들에게 전쟁 참여 독려 광고. "귀신과 짐승같은 적국 미국과 영국을 격멸하자, 한국 대학생의 출정에 대해 만만세를 부르자"는 문구가 마음을 아리게 한다
꿈결
광고가 죽음을 요구합니다. 광고가 적대감을 부릅니다. 일제가 얼마나 잔혹한 자들인지 알 수 있습니다. 광고를 통해서도 일제는 우리 육체와 정신을 파괴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제대로된 사과도 없고, 징용과 군위안부를 '자발성'이라고 합니다. 통탄할 일입니다.
'트로트'. 우리 정서에 맞는 장르입니다. 하지만 대접 받기 힘듭니다. 하지만 트로트는 처음 우리에게 들어왔을 때 굉장히 어려운 노래였습니다. 그리고 왜 '뽕작'이 됐는지 참 재미가 있습니다.
트로트를 '뽕짝'이라는 이유"1934년 고복수의 <타향살이>, 1935년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쯤 도달하면 트로트적인 선율에 '쿵짝쿵짝 쿵짝쿵짝' 하는 2박자가 붙게 됩니다. <황성옛터>와 <타향살이>는 3박자인데, <목포의 눈물>은 트로트 선율에 2박자가 붙어 전형적인 트로트 형태를 띠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트로트를 '뽕짝'이라고 하는게 바로 이 박자 대문이지요. '붕'하고 베이스를 울리고 '짝'하고 위의 음이 연주되는 것을 '뽕짝뽕짝'이라고 다소 비하적인 발음으로 처음 부르게 된 것입니다."(본문 69쪽) 뽕짝에 대한, 아니 트로트에 대한 우리 생각을 조금은 고칠 필요가 합니다. 사람들은 트로트를 촌스럽다거나, 조금은 수준 낮은 장르로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트로트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매우 어려운 노래였다고 합니다. 이유는 우리 민족이 그 동안 불렀던 장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일제식민지와 한국전쟁 때 불려진 트로트는 나라와 가족을 잃은 비극을 잘 드러낸 노래들이 많습니다.
일제 경찰은 재판까지... 이 사람들 장난 아닌데어른들은 '순사'라는 단어를 매우 무서워합니다. 순사는 일제식민지 용어로 요즘 말로 하면 경찰입니다. 친일부역자 첨병이 바로 이들이지요. 김인회 교수 근대 '사법제도' 강의에 따르면, 일제식민지 경찰은 체포 권한이 있었습니다. 나아가 체포한 사람을 억류해서 가둬놓고 합법적으로 고문할 수 있었습니다. 가벼운 죄일 경우에는 직접 재판까지 합니다. 이것이 즉결 심판입니다. 태형령을 통해서 직접 형을 집행하기도 했습니다. 경찰이 재판하고 집행까지 했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국민기본권이 보호받으려면 수사하는 곳과 재판하는 곳, 집행하는 곳이 달라야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징역형을 교도소에서 집행하지요. 그러나 일정감점기에는 이런 기관들을 유지하는 데 돈이 많이 드니까 경찰이 모든 것을 다 했다고 하니 어안이 벙벙합니다.
검찰과 경찰이 '수사권' 문제를 놓고 날선 공방을 벌이고 있습니다. 밀양 한 경찰이 밀양 한 검사를 고발한 것이 단적인 예입니다. 지난해는 일선 수사 형사들이 '수갑'을 반납했지요. 2012년 대한민국 검찰보다 더 힘이 막강했습니다.
간송, 기와집 열 채 값으로 훈민정음해례본 구입이충렬 작가의 '문화재' 강의는 일제강점기에 전 재산을 바쳐 우리 문화재를 수집했던 간송 전형필의 이야기와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들의 현황을 통해, 한 사람의 관심과 열정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해줍니다.
요즘 훈민정음해례본을 두고 법정공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감정가가 1조 원 정도라고 합니다. 이는 값어치를 매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간송은 "<훈민정음>을 기와집 한 채 대접을 해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기와집 열 채 값을 치러야 된다"고 했습니다. 간송같은 분들이 많으면 대한민국 문화재가 더 많이 우리나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라디오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걸까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지만 어릴 적 라디오에 사람들이 들어간 줄 알았습니다. 집에 전기가 들어온 곳은 초등학교 3학년(1975)때였습니다. 라디오는 아마 더 어릴 때였던 것 같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라디오는 제일 싼게 60원, 고급형은 1000원 정도 했습니다. 당시 전문직공 하루 임금이 1원이니, 왠만한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한 것이지요. 텔레비전이 우리나라에 막 들어왔을 때 동네에 한두 대 있었던 것처럼 일제식민지 라디오도 마찬가지였던 셈이지요.
요즘 집값을 보도할 때 월급을 10년 이상 쓰지 않고 모아야 한다는데 아마 그 때는 한 푼도 쓰지 않고 두 달은 모아야 라디오를 살 수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더구나 라디오 수신료가 2원, 소몸품비 2원이 들었다니 라디오가 있어도 듣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후 방송사를 가장 먼저 장악하고, 전두환 역시 방송통폐합을 한 것은 여론을 통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일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시체제로 치닫던 1937년부터 라디오를 통해 궁성요배, 황국신민체조(국민건강체조), 조선인 묵념 시간과 신체를 통제했습니다. 이같은 일제의 잔제는 1980년대까지도 남아있었습니다. 이른바 국기하강식이 예입니다. 길가다가 국기하강식을 하면 길에 멈췄던 일이 생각나는 분들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조선>은 정말 민족지일까<조선일보>는 1920년대 중반에서 1930년대 초까지는 일제에 저항합니다. <동아일보>도 비슷합니다. <조선일보>는 문자보급운동, <동아일보>는 농촌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을 했습니다. 특히 <조선일보>는 월남 이상재 선생과 안재홍, 조만식 선생이 사장으로 있을 때는 <조선일보>에 관여하는 이들이 신간회를 결성했습니다.
하지만 계초 방응모가 1933년 사주가 되면서 <조선일보>는 변절의 길로 들어섭니다. 지금 <조선일보>는 '민족지'라고 자랑하지만 방응모 시대가 아니라 이상재, 안재홍, 조만식 사장때가 민족지였지요. 지금은 '수구 찌라시'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습니다.
일제, 조선 민중 땅 빼앗아 철도 건설마지막으로 이수광 작가의 '철도' 강의는 조선인들의 눈물과 고통으로 부설한 철도가 당시 조선인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놓았는지 소개합니다. 조선 사람들 땅을 빼앗고, 강제로 공사장에 동원해서 만든 철도로 사람들은 창경원에 벚꽃을 보러 갔고, 일본 유학길에 오르며 신문명을 만끽했습니다. 일본 우익은 이런 것을 두고 일제가 조선 근대화에 도움을 줬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조선 민중들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이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면 조선 역시 철도를 개설했을 것이고, 조선 민중들을 땅을 빼앗기지 않고, 철도 문명을 만끽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볼프강 쉬벨부쉬의 <철도여행의 역사>가 생각납니다.
볼프강 쉬벨부쉬는 기차가 현재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모습으로 발전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서러움과 고통을 겪고 노력을 하였는지 말합니다. 기차가 사람들에게 처음 속살을 드러내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반기지 않았습니다. 시간의 단축과 절약, 속도감 때문에 감사패를 전달하지 않았습니다. 기차는 사람의 대화를 단절시켰습니다. 나와 너의 진솔한 대화를 나누게 한 마차의 좁은 공간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열차를 타고 하는 여행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자연 조망, 산이나 계곡의 아름다운 전망은 아예 사라져버리거나 아니면 왜곡되어 버린다. 지형을 오르고 내리는 것, 건강한 공기 그리고, '거리'라는 말로 연결되는 다른 모든 기분 좋은 연상들을 사라지거나 아니면 황량한 단절들, 어두운 터널들, 그리고 위협적인 기관차의 건강하지 않은 가스 분출이 되어 버린다." <이토록 아찔한 경성>이 다룬 내용은 광고, 문화재, 트로트, 신문과 라디오, 철도 따위입니다. 2012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와 100년 전 조선민중들 삶과 욕망이 별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현대 문명이 더 욕망이 찌들었는지 모릅니다. 과연 우리가 100년 전 그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토록 아찔한 경성>은 그 작은 답을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