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천 영감은 아파트 쓰레기통을 뒤지다 열일곱 여덟쯤으로 보이는 아이에게 된통 맞는다. 조금이라도 늦게 저항 했더라면 눈알이 빠져나갔을지도 모를 정도로 엄청난 폭행이었다.
복천 영감이 이처럼 맞은 것은 남의 돈벌이 구역에서 함부로 쓰레기통을 뒤져 고물로 팔 수 있는 음료수병 6개를 챙겼기 때문이다. 몇 년째 서울거리를 하루 종일 누비며 칼갈이를 해 먹고 사는 복천 영감은 이날의 엄청난 폭행으로 며칠간 몸져눕고 만다.
<비탈진 음지>(해냄 출판사)의 주인공 복천 영감은 이른바 '무작정 상경 1세대'이다. 우리나라에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등지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 온.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1970년대 초. 혈혈단신 무일푼인 복천 영감이 논 몇 마지기를 살 수 있도록 밤낮없이 악착같이 일했던 그의 아내가 희귀암에 걸려 죽고 만다. 어린 남매와 몇 년 째 소식이 없는 큰 아들 영기를 남긴 채. 그동안 부부가 악착같이 일해 마련한 몇 마지기의 논도 집도 잡아먹고 갚아야 할 빚만 잔득 남긴 채 말이다.
아내의 치료비 때문에 집문서까지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갔고, 나이 든 몸이라 소작도 품팔이도 요원하기만 한 복천은 두 어린 남매와 꼼짝없이 길거리로 나 앉거나 굶어 죽을 판이다. 이런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남의 종살이 뿐. 그러나 머슴으로 성장한 자신처럼 아이들까지 다시 종살이를 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먹고 살길이 캄캄한 현실 앞에 복천은, 밭갈이를 할 것처럼 이웃의 쟁기질 하는 소를 빌려 그것을 팔아 어린 남매의 손을 끌고 서울로 야반도주 하고 만다.
언젠가는 비닐봉지에 담긴 닭을 찾아들었다. 그 닭은 으레 유리 상자 속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며 사람 회를 동하게 하는 전기통닭구이라는 것이었다. 어떤 배부른 사람들이 두 다리만 뜯어먹고 통째로 버린 것이었다. 벌써 이 사이사이에서는 군침이 스며 나왔다. 비닐봉지를 뜯어 냄새부터 맡았다. 좀 이상했다. 그러나 못 먹을 정도로 심한 것 같지는 않았다. 언뜻 두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설마……. 망설이다가 마음을 다졌다. 어린것들의 속에 배탈이라도 난다면 먹지 않음만 못한 일이었다. 마침 봉지에 후춧가루까지 섞은 소금이 있어서 닭을 맛있게 뜯었다. 그날 밤 자다가 일어나 변소 문을 붙든 채 옷에다가 좍좍 설사를 했다. 이틀간이나 일을 못나가고 서너 차례씩 설사를 했던 것이다. 복천 영감은 상한 닭을 먹은 것을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아이들에게 먹이지 않은 자신의 현명함에 저으기 만족하고 있었다.-<비탈진 음지>에서
그러나 서울의 현실은 '일자리가 많아 부지런히 일만 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풍문과 달리 냉혹하기만 하다. 한해, 두해……, 복천영감은 그나마 가졌던 돈까지 구구절절한 사연과 함께 모두 날리고 밑천이 거의 들지 않는 칼갈이로 이처럼 쓰레기통을 뒤져 남이 먹다 버린 음식에 목숨을 거는 신세가 되기까지 온갖 일을 당한다.
등짐을 져볼까 찾아간 복천의 지게를 빼앗고 몰매질한 남대문 시장의 지게꾼들, 온 가족이 굶어죽을 위기에 입 하나 덜고자 식모로 보내져 성폭행 당한 후 윤락여성으로 팔려간 고향 처녀, 자신들의 밥벌이를 조금이라도 빼앗기지 않고자 복천을 협박하는 공사장 인부들, 떡장수 등 온갖 궂은일을 하며 서울에서의 성공을 꿈꾸나 자식들과 연탄가스에 중독사하고 마는 떡장수 여인 부부, 연탄가스로 떼죽음 당한 형님 가족들을 입은 옷 그대로 버리다시피 장사지내고 돈만 챙기는 떡장수 여인의 시동생, 흠씬 두들겨 맞고 가진 신문까지 팔게 되지 못한 신문팔이 어린 소년, 복천 영감의 전 재산이자 희망인 땅콩 리어카를 교묘한 수법으로 빼돌리는 어떤 청년, 복권 팔이 소녀, 그리고 자신의 구역을 뒤졌다는 이유로 복천 영감을 죽을 지경까지 폭행한 넝마주이 소년…….
복천 영감이 먹고 살길을 찾아 헤매며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은 복천 영감처럼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이미 복천 영감보다 먼저 무작정 상경을 한 사람들이거나, 하루에 단 한 끼 밥이라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기를 바라며 몸을 밑천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손을 놓는 순간 굴러떨어지고 말 정도로 비탈진 곳에서 좀체로 들지 않을 희망을 가까스로 붙잡고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그들은 모진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자신처럼 몸 하나로 살아가려고 하는 누군가를 헤아릴 여유가 전혀 없다. 소설은 복천 영감이 만나는 사람과 겪어내는 세상을 통해 '산목숨에 거미줄 칠 수 없어' 모질게 살아내야만 했던 우리 부모세대들의 어쩔 수 없는 비정과, 도시 민민들의 실태와 우리의 산업화의 그늘들을 적나라하게 들려준다.
소설을 읽는 중 가물가물한 기억 속 수많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곤 했다. 1970년대 말~1980년대 중반 무렵 어느 날 동네를 떠나간 동네 사람들과, 겨울이면 대도시로 날품팔이를 떠나곤 하던 동네 아저씨들과 서울로 식모살이 떠난 내 친구 엄마와 누구네 언니, 공장에서 일한다는 동네 언니들과 오빠들이. 그들도 아마 소설 속 그들처럼 견뎌냈으리라.
복천 영감처럼 남이 버린 폐지 때문에 목숨 거는 싸움까지 불사해야만 하는, 우리 주변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폐지 줍는 노인들도 끊임없이 떠올랐다. 동상과 교통사고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하루 몇 천 원 벌이 때문에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거리를 헤맨다는.
한쪽 다리를 잃은 복천 영감은 이후 어떤 세월을 살았을까? 그의 자식들은 지금 어떤 삶을 살아갈까? 40년 전의 현실이라는데, 흘렀다는 그 40년 세월이 무색할 만큼 오늘날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비탈진 음지>(해냄 출판사)는 조정래 작가가 1973년에 발표한 중편 소설을 2011년에 장편 소설로 개작한 것이다. 처음부터 고쳐 쓰는 한편 원고지 200매 분량을 더 써넣었다고. 작가는 이 소설을 왜 다시 써야만 했을까? 40년이나 지난 이야기를 왜 다시 해야만 할까? 40년이나 지난 이야기를 우리는 왜 다시 읽어야 할까? '작가의 말'일부를 덧붙인다.
...최근에 어느 텔레비전 화면에 70객의 할머니 둘이 폐품 종이상자를 서로 뺏으려고 다투는 모습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어떤 할아버지는 하루 종일 폐품을 주워 팔아야 하루 벌이 이천 원이 될까 말까 하다며 탄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존재가 특이해서 텔레비전 화면에 비쳐진 것이 아닙니다. 그런 70객들은 인사동 뒷골목에서도, 압구정동 뒷골목에서도, 천호동에서도, 구로동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기 때문에 비친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40여년 전의 '무작정 상경 1세대'입니다. 국민소득 150불 시대의 도시 빈민들이 국민소득 2만불 시대에도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심각한 사실이 우리의 현실이며, 중편 <비탈진 음지>를 장편 <비탈진 음지>로 개작해야 하는 이유였습니다.
'굶주리는 사람이 단 하나만 있어도 그건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시인 릴케의 고통스런 읊조림입니다. 하물며 소설가로서 오늘의 우리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독자들 또한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일원입니다. <비탈진 음지>를 읽을 필요가 없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고대합니다.-<비탈진 음지> '작가의 말'에서
비탈진 음지 - 조정래 장편소설
조정래 지음,
해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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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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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 "이 소설 읽을 필요가 없는 날 빨리 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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