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보수라 자칭하는 60대 아버지와 합리적 진보를 표방하는 30대 아들은 20대 초반부터 서로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서로의 정치적 고견에 이의를 제기하기보다 '내 생각은 이런데 당신의 생각은 어떠세요?'라는 식으로 대화를 하며 보수와 진보의 간극을 확인하곤 합니다. 물론 간극이 쉽사리 줄어들지 않으니 자연스레 서로를 설득하기 위한 노력들이 다양하게 일어나곤 합니다. 벌써 15년이 넘었지만 가족이라는 끈끈한 인연 덕에 서로가 지치지도 않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난 6월 셋째주에는 고향에 계시는 아버지를 뵈러 다녀왔습니다. 고향집에 내려갈 때마다 저는 아버지가 읽으실만한 책 몇 권을 구입합니다. 기독교 관련 서적도 사고, 유기농 채소 재배법이나 명상집, 소설 등등. 다양한 주제와 장르의 책을 사다드립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불순한(?) 아들은 아버지의 정치적 견해와 조금 다른 내용의 책들을 한 권쯤 같이 선물해 드립니다. '저 요즘 이런데 관심 있습니다'라는 의미도 담고 있고, '아버지는 이 책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묻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 역시 그간 <조선일보>에서 읽으시고 '괜찮다' 싶은 기사들을 스크랩 해뒀다가 아들 방에 슬쩍 넣어놓고 '무언의 교양'을 하십니다. 아버지가 넣어주신 기사 스크랩 역시 정치적인 소재는 한두 기사뿐, 대다수는 재테크와 건강, 취미, 도서 등의 내용입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에게 조심스럽게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은근 슬쩍 내비치며 늦은 밤까지 토론을 하기도하고, 책을 나누어 읽고 서평을 하기도 합니다.
제가 이번에 아버지께 불순한(?) 의도를 갖고 선물한 책은 김두관 경남도지사의 <아래에서부터 - 신자유주의 시대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였습니다. 매번 사드린 책은 제가 서울로 올라간 후에 읽으시고 다음에 집에 내려가면 한두 마디 의견을 주시던 아버지는 최근 <조선일보>의 김두관 도지사 보도 덕분인지 책에 많은 관심을 보이셨고 하룻밤 사이에 책 한 권을 다 읽으셨습니다. 덕분에 다음날 이른 아침, 밭과 들을 누비며 아버지와 아들의 책 이야기가 시작됐습니다.
파편난 간극들,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정치는 없을까
"책 어떻게 보셨어요? '정권 교체'를 넘어 '시대 교체'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정신인거 같던데요."(아들)
양극화 시대에서 경제민주화와 서민복지의 시대로, 중앙집권의 시대에서 자치분권의 시대로, 분단 시대에서 평화통일 시대로 전환해야 한다는 김두관 지사의 과제 설정이 어떻게 느껴지셨는지 여쭤봤습니다.
"그 '시대 교체'라는 점은 존중한다. 이제 더 이상 소모적인 논쟁은 필요하지 않은 것 같거든. 다만 양극화를 해결하자면 분배가 필요한데 성장 없이 분배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이명박이 잘못해서 그렇지. 보수진영에서도 충분히 고민하고 양극화 해결을 위한 다양한 정책들을 내놓고 있지 않냐."(아버지)
역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으십니다. 현 정권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김두관 지사는 '시대 교체'라는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원칙을 확고히 지키면서 지지층을 넓혀 가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텐데, 보수진영은 그게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김 도지사는 이장, 군수, 도지사 시절에 반대세력인 한나라당을 설득해 정책을 추진한 경험이 많지만 보수진영 후보들은 그런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잖아요. 틀니사업이나 이런 거만 봐도 그렇고."(아버지)
김두관 지사가 아래에서부터 활동반경을 한 칸 한 칸 넓혀왔고, 그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체험적으로 마련해왔다는 데는 아버지도 공감을 하시는 눈치입니다.
"다른 것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공정한 사회'와 '공평한 세상'을 꿈꾼다는 말은 가슴에 와 닿더라. '불환빈 환불균(不患貧 患不均)'이라고 했나? '백성은 가난함을 근심하지 않고, 고르지 못함을 근심한다'는 문구는 어떻게 보면 지금 이 정권과 보수진영이 가장 뼈저리게 느껴야할 대목이라고 본다."(아버지)
자칭 합리적 보수라는 아버지에게도 최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칙, 특권, 불법에는 화가 나계신 모양입니다. 이것은 저 역시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이런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2시간 여 남짓 고향집 감자밭에서 호미질하며, 땡볕 비닐하우스 안에서 꽈리고추를 따며 부자는 책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주거니 받거니 했습니다. 한 달에 얼마 안 되는 돈을 벌기 위해 하루 종일 밭과 들에서 몸을 움직이며 서민의 삶을 사시면서도 합리적 보수를 자칭하는 아버지를 이날도 쉽사리 이해하긴 어려웠습니다. 결국 아버지와 저의 간극은 이날도 쉽사리 좁혀지지 않았고, '공정한 사회'를 꿈꾸고 만들 수 있는 인물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모호한 지향만 확인했습니다.
이 모호한 태도는 어쩌면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혈연적 동질감보다 '보수'와 '진보'라는 철학적 이질감이 만들어낸 결과물인지 모르겠습니다. '시대 교체'라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이렇게 파편난 서로의 생각들을 하나로 모으고 통합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대선정국에서는 치열하게 싸워야겠지만 선거가 끝나면 모두의 아픔을 안을 수 있는 정치가 필요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 과정을 몸소 경험한 대선주자, 대통령을 아버지와 아들은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노무현 너머, 룰라를 너머 그리고 어게인 2002
서울에 올라와 다시금 <아래에서부터>를 펼쳐 들었습니다. 그리고 2002년 대선과 같이 민주진보개혁진영에 서 있는 사람들의 가슴을 타오르게 할 'Beyond 노무현, Beyond 룰라 그리고 Again 2002'라는 시대 목표와 "산처럼, 힘들고 어려운 국민을 품어주고, 다시 시작할 용기를 주는 정부. '산보다 나은 정부'"라는 그의 인생 목표를 확인했습니다. "언덕은 내려다봐도 되지만 사람은 절대로 낮춰보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잊지 않고 섬김의 정치를 실현하고 있는 김두관 지사, "한국의 룰라가 되겠다"고 주장하는 김두관 지사를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대선 출마 지지 선언과 함께 그가 장고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일부는 그의 낮은 지지율을 걱정하고, 일부는 도지사직을 유지한 채 대선에 나서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2002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가능성에 주목했던 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1.5%의 지지율에서 출발했고, 후보가 되어서도 당 내외에서 끈임없이 공격을 당했지만 지방분권과 정치개혁을 위한 서릿발 날리는 외침에 우리는 흥분할 수 있었습니다. 반칙을 용인하지 않고 특권을 배제하겠다는 노무현의 실험은 절반의 성공으로 마무리됐지만, 이제 우리는 그가 추구했던 가치를 넘어서는 절반의 실험을 시작해야 합니다.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 말라."
룰라가 대선에 출마하면서 유권자에게 던졌던 말입니다. 그리고 룰라의 집권이 끝나갈 무렵 많은 브라질 국민들이 "행복해졌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성공한 서민의 정부를 2012년 겨울에는 만들 수 있길 기대해 봅니다. 김두관 지사의 장고를 지켜보고 기다려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