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통령을 군인들이 가만 놔둘까

이집트, 최초의 민선 대통령 선출...강력한 군부와 충돌할 수도

등록 2012.06.26 15:24수정 2012.06.26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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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25일 이집트 국민들은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30년 철권통치에 대항해 마침내 봉기했다. 타흐리르 광장에 모여든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무력행사도 마다하지 않던 무바라크는 봉기가 시작된 지 한 달 뒤인 2월 결국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카이로의 봄.' 이집트 역사상 최초로 발생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

타흐리르 광장을 비롯한 이집트 곳곳의 중심지를 향해 행진하던 시민의 대부분은 어렵게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높은 실업률 탓에 앞날이 불투명한 대학생들, 연일 물가는 치솟지만 수년 동안 제자리인 급여에 신음하던 일반 시민들이었다. 사회 전반에 '뇌물 없이는 아무런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관행이 암세포처럼 번져 이집트 국민의 숨통을 조이던 것도 이집트인들이 혁명에 참여한 이유였다. 한마디로 '세상을 바꾸지 않으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위기감이 당시 이집트를 뒤덮고 있었다.

'누구나 실업자가 되거나 인권침해 당할 수도'... 민주화운동에 불 지펴

 시위 진압을 위해  카이로 시내에 주둔한 이집트 군(2011. 2.21)
시위 진압을 위해 카이로 시내에 주둔한 이집트 군(2011. 2.21)서주

이에 앞서 튀니지의 독재정권이 먼저 무너졌고, 많은 이들은 튀니지혁명이 '카이로의 봄'을 이끌었다고 말한다. 이집트인들은 여기에 동의하면서도, '카이로의 봄'에 불을 지핀 것은 2010년 6월, 알렉산드리아의 청년 칼리드 사이드의 죽음이었다고 말한다.

당시 평범한 대학생이던 칼리드 사이드는 오후에 축구를 하러 친구들과 나갔다가 경찰들의 마약 밀매 현장을 목격했다는 이유로 싸늘한 주검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이집트 대학생들 사이에는 '칼리드 사이드 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이집트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면 직장을 구할 수 없는데다, 구할 수 있는 일자리마저도 넉넉하지 않다. 이 때문에 청년들은 막대한 등록금을 지불하고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부모에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제복을 입은 군인들은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며 지식인층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곤 했다. 학생들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비인권적인 현실을 절감했고, 졸업 후 자신들이 처할 암울한 미래에 분노했다. '나는 칼리드 사이드'라는 정신은 그렇게 이집트 대학생과 지식인들의 가슴에 각인되었다.

간신히 혁명은 이루어졌지만 이집트가 완전한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걸어야 할 길은 여전히 멀고도 험했다. 지난해 2월, 무바라크가 물러난 이집트의 국가운영은 모하메드 후세인 탄타위 국방장관이 위원장을 맡은 '군 최고위원회(SCAF)' 몫으로 돌아갔다.


탄타위 위원장은 국민들에게 ▲ 혁명 3개월 안에 내각 구성 ▲ 6개월 내에 국회의원 선출을 위한 국민투표 실시 ▲ 9개월 내에 대통령선거 실시를 약속했다. 또 에삼 샤리프를 국무총리로 임명, 과도정부의 내각을 구성했고 3월에는 임시헌법개정안을 발표해 대통령선거로 가는 길을 정립했다. 무바라크 정권의 인사들은 줄줄이 소환되었다.

그즈음 인접한 리비아에서도 시민혁명이 일어나면서 이곳에서 일하던 수백만 명의 이집트인 노동자들과 외국인들이 이집트 국경으로 물밀듯 몰려왔다. 이 때문에 혁명으로 고삐가 풀려버렸던 이집트 국내 치안은 더더욱 불안정해졌다. 혁명 반년이 넘도록 이집트 국민의 삶은 나아진 게 없었다. 수도 카이로의 치안은 부재상태에 가까웠고, 국회의원선거조차 제때 이행되지 않았다.


자유무역도시와 산업도시들을 기점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인상파업은 연일 강도를 더해갔다. 2011년 상반기 동안에만 문을 닫은 공장들이 600여 곳에 달하는 등 이집트는 경제마저 위기였다. 게다가 무바라크 정권의 퇴진으로 '뭉쳐서 한목소리를 내면 우리의 요구가 성취될 수 있다'는 사실을 국민이 경험했다. 이 때문에 2011년은 이집트 전반에서 시위가 들끓던 한해였다.

늦어지는 개혁의 속도에 불안해진 것은 국민이었다. 이집트 국민은 탄타위 위원장과 군 최고위원회가 혹시 통치권을 민간에 이양할 의사가 없어진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타흐리르 광장의 혁명가들은 해산을 거부했고, 매주 금요일 전국의 주요 도시 중심가에서는 군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지지부진한 개혁에 분노한 시민들, 또 광장으로...

 이집트 국민은 무바라크 하야 이후 탄타위 위원장과 군 최고위원회가 혹시 통치권을 민간에 이양할 의사가 없어진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타흐리르 광장의 혁명가들은 해산을 거부했고, 매주 금요일 전국의 주요 도시 중심가에서는 군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사진은 지난해 3월 2일 카이로 시내에서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
이집트 국민은 무바라크 하야 이후 탄타위 위원장과 군 최고위원회가 혹시 통치권을 민간에 이양할 의사가 없어진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타흐리르 광장의 혁명가들은 해산을 거부했고, 매주 금요일 전국의 주요 도시 중심가에서는 군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사진은 지난해 3월 2일 카이로 시내에서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 서주

오랜 세월 군인이었던만큼 탄타위 위원장에게는 '인권'보다는 '국가 안보'가 먼저였던 것일까. 무바라크 시대를 연상케하는 인권탄압에 참다못한 국민들은 2011년 11월 다시 일어섰다. 이후 군인·경찰과 시민이 충돌하면서  무려 30여 명이 사망했고 20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시위대는 '탄타위를 교수대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결국 11월 21일 에삼 샤리프 국무총리가 책임을 지고 자진사퇴했고, 경제학자인 카말 알 간주리가 새로운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이후 군 최고위원회는 옛 정권 시절 여당이었던 국민민주당의 입후보를 제한한다고 했다가 전면 허가하는 등 우왕좌왕한 끝에 2011년 11월 무바라크 퇴진 후 첫 선거인 하원 총선을 실시했다. 11월, 12월, 그리고 올해 1월 세 차례에 걸친 투표 끝에 총 508개 의석 가운데 최고통수권자가 임명할 수 있는 10명을 제외한 498명의 국회의원들이 선출됐다. 최종 개표 결과 무슬림형제단이 이끄는 '자유와 정의'당이 235석(47.2%)을 얻어 제1당이 됐고, 이슬람원리주의자인 살라휘가 이끄는 '누르'당이 125석(25.1%)을 얻어 2위를 차지했다. 지난 수십 년간 무바라크 정권의 가장 큰 적수였던 무슬림형제단이 이집트 최대정당으로서 거듭난 것이다.

이제 민주화로 가는 길에 들어선 이집트가 반드시 밟아야 할 마지막 디딤돌인 대통령선거가 끝났다. 현지시각으로 24일 오후, '자유와 정의당'의 모하메드 무르시 후보가 민주 이집트의 초대 민선 대통령으로 호명됐다. 하지만 유권자의 52% 득표율로 얻은 절반의 승리였다. 국민의 절반은 무르시 대통령에 호의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실 국민은 지난 16~17일(현지시각) 2차 선거를 치르면서도 떨떠름해했다. 심지어 시위대 사이에서는 '아무나' 혹은 '절대로 누구도 뽑지 않겠다'는 뜻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등장할 정도였다. 암로 무사 등 주목받던 후보들이 1차 선거에서 대거 탈락하는 바람에 '무슬림형제단' 아니면 '군부'로 선택권이 제한됐기 때문이다. 무슬림형제단이 이끄는 '자유와 정의당'의 무르시 후보는 너무나 이슬람 성향이 강했고, 무바라크 정권의 총리를 지낸 아흐메드 샤피크 후보는 군을 대표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민선 대통령 탄생했지만... 이슬람주의 강화에 군부와의 갈등 우려

 카이로 시내를 돌아다니는 이집트 군인들(2011.2.21)
카이로 시내를 돌아다니는 이집트 군인들(2011.2.21) 서주

그러나 무르시 후보의 승리로 민간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우려한 군 최고위원회는 대통령 통치권 제한을 위해 선거 하루 전인 15일 '국민의회 해산'이라는 초강수를 밀어붙였다. 모두 걱정하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드디어 군의 야욕이 드러났다'며 타흐리르 광장의 혁명가들과 국민은 흥분했다. 이는 무슬림형제단에 호의가 없었던 표심마저 그쪽으로 끌어들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무르시 후보는 섣불리 승리를 발표해 군부와 이집트 선거관리위원회의 심기를 건드려버렸다. 또 샤피크 후보 측이 52대 48이라는 박빙의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대선 결과 발표는 월요일(21일)에서 목요일, 다시 토요일, 그리고 일요일로 미뤄졌다.

국민은 미국에서 유학한 엔지니어 출신 무르시 당선자보다 그의 뒤에 버티고 있는 무슬림형제단에 주목하고 있다. 그가 이집트의 대통령이 된다면, 그는 무슬림형제단의 입 이상은 되지 못하리라는 게 중론이다.

무르시 후보와 무슬림형제단은 이집트 기성세대를 대변하며 엄격한 이슬람 규율로 향후 이집트를 이끌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이 여성이 일정 학력 이상 교육을 받는 것을 금지할 수 있다는 전망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사실 무르시 후보는 이 점에 대해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또 그는 지난 2007년 모든 무슬림 여성들은 베일을 둘러야 한다는 등의 당 지침을 설계했는데, 이 공약 역시 유효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외교정책과 관련해 무르시 당선자는 대미종속형 외교에서 벗어나 친유럽 정책을 펼쳐 유럽과 관계를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 나세르와 사다트, 무바라크에 이르기까지 이집트는 군 출신의 강력한 대통령이 이끄는 나라였다. 국가의 성장과 군의 성장이 함께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이집트의 군은 각종 이권사업에 관여해왔으며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그리고 값싼 주택을 지원받는 등 여느 국민은 누릴 수 없는 온갖 특혜의 수혜자였다.

이러한 탓에 국민은 군이 민간 출신 대통령에게 고스란히 정권을 이양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실제로 외신은 '군과 민간 정권의 대치'야말로 향후 이집트에 닥칠 최악의 시나리오라고 예상하고 있을 정도다. 로이터통신은 '이집트는 혁명 → 민간 대통령 선출 → 군과 민간 정부의 충돌 → 내전으로 이어진 알제리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점치기도 했다. 한편 2차 대선이 실시될 즈음 군 최고위원회는 '군과 군 최고위원회를 모독하는 언행을 앞으로는 좌시하지 않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 원고는 네이버의 <마담 아미라의 이집트여행>카페에도 시차를 두고 실릴 예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 원고는 네이버의 <마담 아미라의 이집트여행>카페에도 시차를 두고 실릴 예정입니다
#이집트대통령선거 #이집트민주화 #카이로의봄 #아랍의봄 #무슬림형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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