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 진압을 위해 카이로 시내에 주둔한 이집트 군(2011. 2.21)
서주
이에 앞서 튀니지의 독재정권이 먼저 무너졌고, 많은 이들은 튀니지혁명이 '카이로의 봄'을 이끌었다고 말한다. 이집트인들은 여기에 동의하면서도, '카이로의 봄'에 불을 지핀 것은 2010년 6월, 알렉산드리아의 청년 칼리드 사이드의 죽음이었다고 말한다.
당시 평범한 대학생이던 칼리드 사이드는 오후에 축구를 하러 친구들과 나갔다가 경찰들의 마약 밀매 현장을 목격했다는 이유로 싸늘한 주검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이집트 대학생들 사이에는 '칼리드 사이드 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이집트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면 직장을 구할 수 없는데다, 구할 수 있는 일자리마저도 넉넉하지 않다. 이 때문에 청년들은 막대한 등록금을 지불하고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부모에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제복을 입은 군인들은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며 지식인층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곤 했다. 학생들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비인권적인 현실을 절감했고, 졸업 후 자신들이 처할 암울한 미래에 분노했다. '나는 칼리드 사이드'라는 정신은 그렇게 이집트 대학생과 지식인들의 가슴에 각인되었다.
간신히 혁명은 이루어졌지만 이집트가 완전한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걸어야 할 길은 여전히 멀고도 험했다. 지난해 2월, 무바라크가 물러난 이집트의 국가운영은 모하메드 후세인 탄타위 국방장관이 위원장을 맡은 '군 최고위원회(SCAF)' 몫으로 돌아갔다.
탄타위 위원장은 국민들에게 ▲ 혁명 3개월 안에 내각 구성 ▲ 6개월 내에 국회의원 선출을 위한 국민투표 실시 ▲ 9개월 내에 대통령선거 실시를 약속했다. 또
에삼 샤리프를 국무총리로 임명, 과도정부의 내각을 구성했고 3월에는 임시헌법개정안을 발표해 대통령선거로 가는 길을 정립했다. 무바라크 정권의 인사들은 줄줄이 소환되었다.
그즈음 인접한 리비아에서도 시민혁명이 일어나면서 이곳에서 일하던 수백만 명의 이집트인 노동자들과 외국인들이 이집트 국경으로 물밀듯 몰려왔다. 이 때문에 혁명으로 고삐가 풀려버렸던 이집트 국내 치안은 더더욱 불안정해졌다. 혁명 반년이 넘도록 이집트 국민의 삶은 나아진 게 없었다. 수도 카이로의 치안은 부재상태에 가까웠고, 국회의원선거조차 제때 이행되지 않았다.
자유무역도시와 산업도시들을 기점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인상파업은 연일 강도를 더해갔다. 2011년 상반기 동안에만 문을 닫은 공장들이 600여 곳에 달하는 등 이집트는 경제마저 위기였다. 게다가 무바라크 정권의 퇴진으로 '뭉쳐서 한목소리를 내면 우리의 요구가 성취될 수 있다'는 사실을 국민이 경험했다. 이 때문에 2011년은 이집트 전반에서 시위가 들끓던 한해였다.
늦어지는 개혁의 속도에 불안해진 것은 국민이었다. 이집트 국민은 탄타위 위원장과 군 최고위원회가 혹시 통치권을 민간에 이양할 의사가 없어진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타흐리르 광장의 혁명가들은 해산을 거부했고, 매주 금요일 전국의 주요 도시 중심가에서는 군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지지부진한 개혁에 분노한 시민들, 또 광장으로...